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mi Lee Jul 06. 2023

깜깜하고 새하얀

그 속에 선명한 것

“나는 다 괜찮아. 너 하고 싶은 거 하자.”


오래도록 남들도, 나 조차도, 나는 성격 좋은 아이, 둥글하게 모나지 않은 아이, 너 좋을 대로 하라는 배려심 많은 아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내가 맞다.

말을 잘 들었다. 원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본 적도 없이, 남들과 비슷한 것 같은 어떤 길을 걸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에서 늘 방실방실 웃으며 끝내주게 일을 처리하면서, 마음은 시커맸다. 절대로 그 마음의 색을 들킬 수 없어서, 멋진 회사생활을 했다. 미성년자 일 때는 엄마, 아빠가 내 주인이었고, 회사에서는 회사가 내 주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니,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가족 구성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위해서도 당연히 내 몫을 잘 해내야 했다. 그걸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고의 무엇이 되기 위해 까맣게 앓던 마음에 걱정을 추가했다. 이러다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답은 아이였다. 아이 옆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것, 엄마라면 그런 헌신을 해야 하는 것, 내 일을 하면서 나는 그런 엄마가 돼줄 수 없는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늘 생애 최초의 웃음과 울음을 터트릴 그 아이를 어떻게 떼어낼 수 있을 것인가? 대체 마음속 어디에서 그런 결론이 샘솟아 났던 걸까? 물론 나는 그때 마음 같은 그런 엄마가 되지 못했다. 나는 아이를 키우려 아이 옆에 들어앉았는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나만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에서 퐁퐁 솟아나던, 아이와 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애틋함은 내 마음밭에 이미 무성히 자라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씨앗만이 뿌려지고 자라 있었다.  

내일모레 칠순을 앞둔 아버지는 평생 고장 난 폭탄처럼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그 폭탄에 수백 번 산산조각 난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그리고 나와 동생도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 괜찮은 평가, 괜찮은 직장을 다닌 덕분에 아빠의 폭언이 간혹 비켜갔다. 가족을 대신하여 작은 말대꾸 같은 걸 해보기도 했다. 늘 엄마는 감내하며 살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은 폭탄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리고 참는 것. 다른 의견을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그럼에도 마음이 괜찮지 않은 혼란. 내가 선택한 많은 것들이 그냥 무엇인가 이상한 내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내 아이를 키우며 알아갔다. 아이에게 하는 네 생각을 말해보라는 말, 아이를 기다리는 말과 마음은 돌아서 내 귀와 머리와 심장으로 들어왔다. 아. 이것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이다.

시커먼 마음으로 다녔던 회사는 알아차리지 못한 타의든 자의든 이제 과거로 흘러갔다. 더 나은 말 씨앗, 글 씨앗을 그때부터 마음에 뿌려댔다. 닥치는 대로 읽으며, 배우지 못한 세계를 배웠다. 아이의 세계만큼, 내가 만난 책만큼 세계가 넓어졌다. 내 곁에는 좋아하는 것만 남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이라는 것을, 꿈이 그런 것이라는 걸 그 당연한 것을 애써 알아가고 있다.

아이 앞에 당당한 어른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실은 아직 잘 모르겠다. 엄마가 쓴 글과 그림으로 책도 만들고, 그림 그리며 사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사람이 된 모습으로 살고 싶다. 좋다는 건 이런 거다. 해도 해도 자꾸 하고 싶고, 어느 날 손을 놓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 나는 깜깜하거나 새하얗기만 한 내 세상에서 좋았던 그것을, 글과 그림을 다시 잡아보려고 한다. 정말 좋아하는 걸 하는 게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립서점이야기 오래책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