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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은 Jan 24. 2023

가을, 그리고 소각

가을과 널 보내며, 가은이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랑했던 가을이 지나고 있어.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잔뜩 데어버린 여름을 마치고 이제는 그 화상들을 포근히 숨길 겨울이 올 거야.


   돌이켜보니 나의 모든 여름들은 늘 후회로 마무리되었던 것만 같아. 그건 아마도 효용성 없는 일들로 두 계절을 모두 보내버렸다는 회의감과 외로움 때문이었겠지.



   그건 이번 여름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네. 새해를 맞이하며 다짐했던 일들의 절반은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고,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에 잔뜩 절여져 있었으니 말야.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봤어. 고질적으로 추위에 약한 체질인데도 요즘은 자주 창문을 열어두고 있어.


   찬 공기를 맡으면 가을 냄새가 나. 그 냄새에서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상들이 떠올라. 아직 수능냄새가 나진 않지만, 이 가을 냄새는 상당히 많은 것들을 표방하고 있는 것 같아.


   아침 점심 저녁의 시기를 차치하고, 왜인지 가을 공기에서는 왜인지 무언가를 소각하는, 그러니까 약간의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실제로 낙엽들을 소각하기 때문에 그런 냄새가 나는 걸까?




   난 이 약간의 탄 내가 뜨거운 여름의 잔재라고 생각해. 나의 모든 것들을 뜨거운 여름에 잔뜩 태워버리고 난 뒤 남은 응어리들의 재 말야.


    너무도 뜨거웠던 여름이었기에 가을은 늘 탄내가 나는 거야. 이는 나의 사랑과 노력들의 재가 이 공기 중에 용해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그래서 가을은 쓸쓸한 것 같아. 예쁜 옷들을 잔뜩 사고, 바쁜 일들에 치여 살고, 많은 지식들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의미 없는 속삭임들을 나눠 보아도 마음속 한 구석이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 수도 없이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내 열정의 소각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어.


   스스로 너무 많은 것들을 태워냈고, 그 소각 과정에서 너무 많이 아팠으니까. 전부 타버린 마음속 한 켠은 당장 채워지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지.




   내게는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 어느 한 곳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 갖고 싶은 건 뭐든 가져야만 했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걸 채워내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더 큰 공허를 느꼈던 것만 같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일정 부분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문득문득 가을의 탄 냄새가 코 끝에 스칠 때마다 드는 공허함에는 간혹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곤 해.


   수도 없이 똑같은 옷들을 사고, 똑같은 논지의 책을 읽고, 똑같은 분야의 학문을 계속해서 공부하는 난 한편으로는 정말 질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참 지겨운 사람 같다.


   어느 하나 분개점이 발생했을 때, 어느 하나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수도 없이 무너지면서도 그걸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생각하니 말야.


   그래서 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용산에도 가지 못하는 걸 거야. 내 생애 최고의 맛집이었던 꿔바로우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고, 기차역도 꼭 서울역으로 예매하는 이유는 이거였겠지. 그곳 어딜 가든 너와 나의 재가 묻어 있으니까. 난 또 그곳에 가면 눈물로 그 재를 씻어내야 할 테니 말야.


   아직 더 많이 태워야 할 것들이 남은 것 같아. 정말 많은 것들을 태워 온 여름들이었는데 말야. 이 시큰함까지 전부 태우기 위해선 더 큰 소각장이 필요하겠지.




   ‘전부 지나갈 테니 아끼지 말자’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아마 가을이 막 시작되려는 시점이었을 거야. 우린 왜 늘 아끼며 사랑했을까. 하릴없이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그 시간에도 우린 부단히 감정을 아끼기 급급했을까. 결국 이젠 남아도는 그 사랑을 모두 재가되도록 소각시켜야만 하는 업보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말야.


   오늘은 ‘Break up season’ 이란 노래를 들었는데, 이젠 정말 계절을 끝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어. 계절이 끝난다는 이야기는 또 새로운 계절이 온다는 거겠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인데 크게 웃을 일이 없었네.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여름밤의 공기가 여전히 코 끝을 맴도니 말야. 크게 슬픈 일들도 없었지만 크게 재밌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


   이제 가을은 크게 재미가 없는 계절이네. 그래도 매년 가을 때에 비한다면 정말 행복하다 생각해. 더 이상 아등바등하진 않아도 되니 말야.


   오늘 밤에도 탄 냄새를 맡으며 재채기를 했어. 내 재채기 속엔 또 많은 잿가루들이 흩어져 나갔겠지.


   난 아마 더 많은 것들을 소각하기 위해서 더 부단히 움직일 거야.


   이 계절은 또 끝날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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