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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Feb 15. 2020

[Web발신] ‘나’의 소득구간이 산정되었습니다

가난의 기준, 가난을 말할 자격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이 하나 있다.


"가난에도 기준이 있을까?"


2020년도 1학기 국가장학금을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전 나의 소득구간이 산정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아침에 막 출근해서 한창 일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음에도 하고 있던 업무를 모두 접고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나에겐 이번이 꼬박 세 번째 신청이었다. 1학년 2학기와 2학년 1학기, 그리고 4학년 1학기까지 총 세 번. 2-3학년 때는 학보사에서 지급되는 각종 장학금 등의 혜택을 많이 받아 국가장학금을 신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꽤나 오랜만에 국가장학금을 신청하게 됐다.


그동안 신청할 필요가 없었으니 관심을 둘 필요도 없었으므로 국가장학금 제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소득분위가 산정되는 기준이 바뀌긴 했는지 등의 정보에 아예 무지한 상태였다. 주변 지인들이 “소득구간이 산정됐는데 난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빚이 몇 천만 원이 넘는데 그건 쏙 빼놓고 단순히 통장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소득구간이 이렇게 높게 산정되는 게 말이 되냐”, “내가 버스 타고 다닐 때 저 친구는 부모님께 받은 차를 끌고 다니면서 왜 저 친구보다 내가 더 높은 소득구간으로 산정되는 거냐”면서 우는 말을 해도 ‘정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라며 애써 외면해왔다.


그 결과로 아마 지금 된통 혼이 난 모양이다. 젠장. 나의 소득구간이 8분위라니. 우리 집의, 부모님의 소득이 8백만 원이 넘는다니.


국가장학금은 1유형과 2유형으로 나뉜다. 그중 1유형이 소득수준에 따라 정부에서 직접 정해진 금액을 지원해주는데, 이때 소득수준은 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본인과 그 부모님, 혹은 신청자가 결혼을 했을 경우엔 배우자의 소득과 재산을 토대로 계산된다(신청자의 형제나 친척 등의 소득과 재산은 합산되지 않는다).


그렇게 계산된 소득수준은 기초생활수급자부터 시작해 10분위까지 총 11분위로 나뉘게 되고, 이 중 8분위까지 장학금을 차등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도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의문스러운 것 또한 숨기고 싶지는 않다.


왜, 어째서 8분위일까?


소득구간이 산정됐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 거 아니야? 이 미친 띠리리들(실제로 엄마는 자체 필터를 거쳐 욕을 쓰신다). 어떻게 우리 집 소득액이 8백만 원이나 돼?”


산정된 소득구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장학재단에서 실제로 소득구간을 산정하는 공식을 검색해서 알아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못 알아듣고 못 알아볼 것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집의 소득구간이 8분위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엄마와 나는 곧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밝혀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우리 집은 2채다. 둘째,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1대씩의 차(총 2대)가 있다. 그리고 셋째, 소득구간이 계산되는 기준이 되는 엄마와 아빠와 나 모두 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가족은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 경기도 변두리에 있지만 아파트 한 채가 있고, 아빠의 성씨촌이 있는 시골엔 할머니께 물려받은 땅이 있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엄마의 티볼리와 아빠의 초장축 화물트럭은 각자의 일터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든든하게 두 분을 에스코트해주고 있다. 25살 막내가 있는 이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에게 손을 벌리지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채찍질한다. 때론 가난한 가정을 꾸렸음을 원망하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묻고, 가난하지 않은 다음 생을 꿈꾸다가도 가난한 현실에 체념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우리 가족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건 고작 우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게 그런 걸. 이렇게나 호화롭게 다 가진 가난뱅이들이 어딨으랴. 우리 집이 8분위라는 뜻은 우리 집보다 더 낮은 소득구간이 여덟 단계나 더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우리 가족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낮은 소득구간을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즉, 우리 가족은 가난하지 않다. 정부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우리 가족이 스스로를 가난하다며 동정해도 얄짤없는 8분위다. 많이 받아봐야 30만 원 정도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8분위다. 적은 금액이라며 무시하는 건 아니다. 받으면 당연히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내야 할 장학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 내 사정일 뿐, 산정된 소득구간은 내게 그 나머지 금액을 능히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정말 그래 보이나? 우리 집이, 우리 가족들의 소득구간이 8분위로 보이나?


한국장학재단이 산정한 소득구간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기 위해 쓰는 글도 애초부터 아니었다. 단지 체감이 안 될 뿐이다. 8분위의 세계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볼 때 우리 가족은 얻은 자산이 많아 보이긴 하다. 어쩌면 8분위도 과소평가된 소득구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얻은 게 많은 만큼 이들을 얻기 위해 짊어졌던 수많은 짐들과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며 살아남아야만 하는 부양가족들과 이들 모두가 덤벼들어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있다. 어째서 이 빚은 소득구간이 산정될 때 고려가 안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고려가 됐다면 그 결과가 8분위일 정도로 우리 집이 잘 사는 것인지도 의문스럽고, 고려가 안 됐다면 고려가 되는 빚과 안 되는 빚의 기준이 무엇인지 또한 의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장학재단이 산정한 소득구간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그저 궁금해졌을 뿐이다.


가난에도 기준이, 정해진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일까?

기준이 있다면, 과연 나는, 과연 우리 가족들은 가난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가난하다고 말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한 걸까?


체감하는 가난과 기준에 부합하는 가난이 맞아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증명해야 할까?

증명을 해야 할까? 나의 가난을?


증명하고 싶은 거면, 나는 ‘가난해지고 싶은’ 걸까?


아무 생각 없이 신청했던 지난날의 국가장학금이 떠오른다. 4-5년 전의 나는 단순히 친구들이 신청하기에, 학교 게시판에 신청하라는 전단지가 붙여있길래, 조금이라도 나라에서 돈을 더 받으면 좋으니까 신청했다. 학교생활에 꼭 필요한 장학금이 아니었기에 소득분위가 산정이 되건 말건, 장학금이 들어오면 좋고, 안 들어와도 그만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는 일도 많이 했고, 많이 일한 만큼 돈도 많이 벌었고, 국가장학금이 아니어도 장학금은 많이 벌었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닌가.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스스로 필요한 돈을 직접 벌어 썼으니.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없는 내 사정을 단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었으니. 내가 번 돈을 내가 쓴다는 것이,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내겐 너무 당연했으니.


이제와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그때부터 개강을 앞둔 지금까지의 순간들이 새삼스러운 건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무엇이? 어떤 점이?


사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풍족해 보이는 것도 몇 년 되지 않은 변화다. 개울가 앞에 지은 집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된 건 3년 조금 넘었을까. 거의 그즈음 걸어서 출근하시던 엄마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으시면서 차를 새로 사셨다. 20년 가까이 한 차를 타셨던 아빠는 미세먼지 저감 정책에 따라 새로운 차를 뽑으셨고, 이 모든 변화를 겪으면서 자란 이들의 자식들은 각자 충분히 먹고 살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 여전히 평생 갚지 못할 빚의 무게는 이제 익숙할 뿐이다. 이제와 말하지만, 3년 전에 산정된 소득구간보다 지금이 더 높게 책정된 이유는 이러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잘 살고 있다. 잘 살게 됐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우리 가족에게 억대의 빚이 있다고. 이렇게 번듯한 가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모님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 노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봤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억울했던 건가? 그래서 나는 나의, 우리의 가난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질문들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내 머릿속을 첨벙거리는 동안 ‘가난’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일까, 절대적인 개념일까? 절대적인 개념이기에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면 되니까. 소득구간이 11개 분위로 나뉘는 것을 보면 가난은 절대적인 개념이 맞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때 소득구간이 가난을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는 소리인데, 과연 소득구간이 능히 가난한 정도를 분류할 수 있을까? 그럴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가난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단순히 가진 것이 없음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이나 그 상태를 말하기에 ‘가난’이란 단어는 이제 너무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 가난 그 자체로 사람이 판단되고, 그 사람의 가정환경을 그려내고, 그 사람 인생의 시작점이 되어준다. 그렇게 가난이 그려낸 그 사람은 적어도 화창한 아침햇살처럼 빛나진 않는다.


그럼 나는 왜 가난하지 못한 나를 이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하지 않고, 풍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유하지 않음을 설명할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부유함’ 보다는 ‘가난함’이 더 내게 와 닿는다. 풍족하지 않았던 몇 년 전도 그랬고, 상대적으로 부유해진 지금도 나는 결코 부유하지 않다. 우리 가족은 알고 있다.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겐 이런 우리 가족의 모습이 수 중에 천 원이 없어서 먹고 싶은 과자를 먹지 못해 징징거리는 아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보다 간절한 사람은 훨씬 많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에겐 가난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산정된 소득구간만으로 충분히,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가난하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보다, 라고.


여전히 가난을 나누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는가,

그 기준에 따라 가난해지거나 또는 부유해질 수 있는가, 의문을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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