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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Jun 08. 2020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서

가난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던 축복의 이유를 알아야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빨강머리 앤>을 보았다. 오래된 만큼 유명한 스테디셀러 고전을 원작에 충실히 각색해 만든 드라마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에 빨강머리를 가진 여자애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지만 씩씩한 성격과 재치 있는 말빨, 남다른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며 떳떳한 어른이 되어가는 앤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시즌3에 이르러 앤은 어엿한 숙녀로 인정받는 16살이 된다. 16살이 된 아침,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하루의 시작인데도 거울 속의 자신이 달라 보이고, 창밖에 떠오르는 햇살이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인 것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커스버트 남매에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앤은 말한다.

“제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어요. 제 가족에 대해 알고 싶어요!”

앤의 선언에 커스버트 남매는 당황한다. 앤은 거의 태어난 직후 부모를 잃었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녀를 고아원에 버리고 떠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앤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부모님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본 적도 없고, 자신을 버렸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해, 궁금할 수는 있어도 본격적으로 찾으러 나서겠다니. 그리고 이 당혹감은 곧 서운함이 된다.

아무리 법적으로 가족이 됐다 한들, 아무리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보살펴준다 한들, 혈육을 향한 끌림은 어쩔 수 없구나. 앤이 만족할 정도로 잘해주지 못해서 다른 가족들을 찾으러 가는 걸까? 정말 가족들을 찾기라도 한다면 피도 안 섞인 자신들이 필요 없어져 떠나버리면 어쩌지?

나는 커스버트 남매와 한 편에 있었다. 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누군지 궁금한 호기심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가족을 (완전히 독립하는 것은 아니어도) 떠나면서까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진짜 가족을 찾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찾을 일인가?’ 싶었다.

무엇보다도 ‘진짜 가족’을 찾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을 양자로 받아준 커스버트 남매가 그녀에게 ‘진짜 가족’이지 않은가? 그들에게 부족함 없는 환경과 사랑을 받고 자라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지, 얼마나 더 받아야 만족을 하려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매는 곧 앤의 뿌리 찾기 여정을 허락한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직접 앤의 부모가 생전 살던 집을 찾아내어 그들의 삶의 흔적이 담긴 책 한 권을 앤에게 전해주기까지 한다. 앤이 말하는 ‘뿌리’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앤이 왜 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16세의 생일날 친부모의 흔적을 찾겠다고 강력하게 선언했는지, 그 이유를, 그 열정을, 그 꿈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커스버트 남매에게서 받아든 친부모의 책을 앤과 함께 펼쳐봄으로써 비로소 ‘뿌리 찾기 여정’이 갖는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책 속에는 그녀의 부모가 죽기 직전까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앤이 받을 사랑이 앞으로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토록 앤이 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엄마가 그려진 그림이 담겨 있었다. 자신과 똑 닮은 그림 속 엄마의 빨간 머리를 보며 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뿌리. 나무가, 식물이, 모든 생명이 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살기 위해 깊이 내리박는 뿌리. ‘나’를 살게 하는 생명 그 자체이자 지금의 나를 ‘나’로 있게 한 삶의 이유.

앤은 진짜 가족을 찾아 떠난 게 아니었다. ‘진짜 나’를 찾아 떠난 것이다. 내가 왜 남들과 다른 빨간 머리를 가졌는지, 하얀 피부를 덮은 수많은 주근깨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내가 가진 남다른 상상력과 표현력은, 동공의 에메랄드빛 색깔과 생김새는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그녀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뿌리를 제대로 찾은 후에야 나의 가지를, 잎을, 비로소 열매를 뻗을 용기를 낼 수 있을 테니까.

태어난 생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을 통해 삶을 만들 수 있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이다. 우리는 저절로 태어난 생명들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부모가 존재하고, 타고난 생김새와 천부적인 재능, 앞으로 살아야 하는 환경을 물려받는다.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나 보니 겪어야만 하는 삶이 준비되어 있다.

극복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차라리 다음 생을 위해 이 생을 저버리고 싶을 정도로라도 살아있는 한은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 생에 놓인 이 삶에 미우나 고우나 적응하고 있다.

나는 나의 가난을 극복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의 가난이, 부모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당히 잘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보기에 우리 가족은 돈이 없다면서 사치를 부리는 평범한 가족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가난은 상대적이기도 하고, 절대적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알아야겠다.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야겠다. 내가 태어난 이 가정에 내려앉은 ‘가난’이란 존재에 대해, 그의 역사를 찾아야겠다.

그래야 내가 이루고자 하는 앞으로의 나의 삶이 등에 업은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목적이 없었던 지금까지의 ‘가난하게 사는 연습’이, 흉내내기에 불과했던 내 글들이, 내 가난 연습이, 내 삶이 저만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 가난했던 시골여자가 만난 부자인 줄 알았던 도시남자

- 엄마는 어떻게 1천2백만 원을 모았을까?

- 아빠는 그 자존심에 고물상을 다니셨다

- 오빠는 가난한 서민 부모님을 원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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