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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Dec 26. 2019

가난해야 하는 이유, 가난해야 사는 이유

돈을 많이 번다고 마음이 풍족한 건 아니었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발행하고 두 달이 넘게 지났다. 그 두 달을 살면서 이렇게까지 하루하루가 미치도록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인간관계가 많이 변했고, 다니는 아르바이트에 정성을 다하지 못했고,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다. 원래도 방을 깔끔히 정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두 달 동안 잠만 자던 티가 나도록 구석에 쌓여있는 빨랫더미와 바닥에 쌓인 먼지 덩어리는 그때의 나를 정확히 보여줬다. 최고의 작업실이던 내 방을 최악의 터로 만든 나는 변명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무책임했다. 내 감정에도, 내 사람에도, 내 존재에도.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꼭 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별 건 아니지만, 아마도.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순전히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직후부터 쭉 용돈을 받지 않았기에 필요한 돈은 직접 벌어 썼다. 20살 때부터 22살이 끝날 때까지.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했고, 돈을 벌 수 있는 시간마다 일을 했다.


잠깐 언급했다시피 20살 때부터 햇수로 5년가량의 주말엔 웨딩홀 아르바이트를 거의 빠진 적이 없었고, 중간중간 학교에서도 학과 생활과 동시에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생활을 했다. 매주 아침에 신문사에 출근해 밤늦게 하교하여 2시간 거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평일을 보내고, 주말은 웨딩홀에 바쳤다. 그러다 통학이 지겹기도 했고, 신문사 국장으로 취임하기도 한 22살엔 아예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서는 평일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쯧쯧.” 누군가 내게 혀를 찬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보이는 걸. 그렇게 보이게끔 내가 생활해온 것을. 그러나.


조금 하소연이자 변명을 해보고자 한다. 나는 그때, 돈에 미친 무자비한 돈벌레가 아니었다. 스크루지처럼 돈을 아끼고 아껴 부를 축적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번 돈을 몽땅 탕진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종류의 취미가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모든 사생활과 꿈과 미래보다도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려 했던 이유가,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무책임했기에, 나 자신을 돌보지 않기 위해 돈을 벌었다. 내 안을 '나' 대신 돈으로 채우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한 행동에 정확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몰랐다. 그 느낌도 몰랐기에 내가 했던 모든 행동에 막힘이 없었다. 주저함 따위도 없었고, 그랬기에 당당했다. 그러나 성인의 행동은 내딛는 걸음마다 발목에 묶인 책임의 무게가 무거워진다는 걸 알았다. 10대 때는 마냥 멋져 보이기만 했던 20대의 그림자를 직접 등에 안게 됐다.


신문사, 정확히 말하면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내가 기대한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단지 세상에 내 이름이 박힌 출판물이 있었으면 했다.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세상 사람들 중 내 글을 봐주고 내 이름에 익숙한 단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길 바라서였다. 그래서 처음 신문사 수습기자로 지원하고, 면접을 보고, 수습교육을 받다가 비로소 정기자가 됐을 때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성취감을 느꼈다. 마치 나를 위해 갈고 닦인 길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찾아낸 느낌이었다. 그걸로 돈까지 벌 수 있으면 정말 번듯한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믿고 거르는 기준이 될 거라는 걸, 내 존재가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무조건적인 무시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당시 신문사의 작업 일정은 그랬다. 월요일 아침 8시에 출근해 그 주 호의 지면 기획회의를 하고, 12시에 수정된 기획안을 교수님께 보여드리는 전체 기획회의를 진행한다. 이때 정해진 기획을 목요일까지 취재해 기사로 작성하고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부장-국장-부주간-주간교수 별로 기사와 지면 편집 대장을 결재받으면 토요일 저녁 즈음 인쇄소에 출력물을 보낸다. 발간된 신문은 다음 주 월요일 아침 9시에 기자들이 직접 트럭을 타 배포 코스대로 신문을 배포한다. 시험기간과 방학을 제외하고 매 학기, 매년 그래 왔다.


신문사에 오래 몸 담으셨던 조교님은 신문사의 작업 일정이 꽤나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안 그래도 30년 선배님이시기도 하기에 신문사에 갖는 애정도 남다르시다. 그래서 조교님은 신문사에 오래 있는 기자들을 더 좋아하셨다. 학교 근처에 사는 동기를 더 아끼셨고, 너처럼 멀리서 통학하느라고 신문사에 오래 있지 않고, 남들보다 빨리 기사를 쓰고 빨리 편집해서 빨리 대장을 출력해서 모든 결재를 받고 토요일 아침 첫 차로 퇴근해 당장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고 해도 조교님 눈엔 신문사에 정성을 쏟지 않는 흔한 기자일 뿐이다. 아무리 글을 잘 쓰고, 편집을 아무리 잘해도 말이다.


선배님들이 아무리 이번 기사 잘 썼다며, 신문사에서 편집을 네가 제일 잘한다며 칭찬을 있는 대로 퍼부어도 신문사를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기자들에게 취재비를 지급하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넌 언제 왔니? 온 줄도 몰랐다’라며 차가운 대우를 받으면, 그러면, 참.


인정 욕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하진 못했어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도 열심히 했다는 것조차 인정받지 못하면, 그러면, 참. 열심히 살기 싫어진다.


익히 알고는 있다. 인맥 욕심이 없기도 해서 나랑 안 맞는 사람에게 굳이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편도 아니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왜 나를 싫어하냐며 따지는 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어디서 찾아보거나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3년 동안 내 글이 읽혀야 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대상에게 순전히 내 글이 아닌 ‘나’라는 존재에 애정이 없다는 이유로 내 작업물까지 평가절하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어쩌면 제대로 내 글을 평가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순간인데. 나한텐 그 정도로 신문사가 소중한데.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냥 싫은가 보지, 납득하고 체념했다. 그때부터 웨딩홀 아르바이트에 더 열심히 임했다. 웨딩홀에서 일하는 시간만큼은 몸만 힘들면 됐다. 신문사에서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웨딩홀 이모들과 삼촌들에게 난 딸 같은 아이였고, 열심히 알바를 나와 열심히 일하는 이쁜 아이였다. 웨딩홀에서만큼은 신문사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신문사 사람들조차 주말에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웨딩홀은 신문사에서의 나의 면죄부였다.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다. ‘여기’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 스트레스를 생각할 필요 없는 ‘저기’로 도망가고, 또 ‘저기’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 또한 잠시 묻어두고 다시 ‘여기’로 돌아갔다. 마치 카드를 돌려 막듯 스트레스를 돌려막았다. 빚처럼 스트레스도 눈덩이처럼 쌓이는데 따로 나눠보면 별 거 아닌 듯 보였다.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편집국장이 되기 전까지는.


부장기자일 때까지만 해도 날 그리 중요한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조교님의 태도가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내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됐고, 내 나름대로의 작업 방식이 생겼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으니 이대로 퇴임만 조용히, 제대로 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집국장 선거 때도 딱히 국장이 될 거라고 기대하거나 욕심을 티 나게 내지도 않았다.


주요 후보는 나와 동기 한 명. 학술부장이었던 나와 취재부장이었던 동기였기에 오히려 학교의 대소사를 바로 눈 앞에서 취재하는 취재부의 특성상 취재부장 동기가 국장으로서 더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 동기는 학교 근처에서 살았고, 1학년 때부터 쭉 신문사에 살 듯이 방문했으므로 동기들 중에서도 유독 조교님이 그를 아끼시기도 했다. 당연히 그 동기가 국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표 차이로 내가 국장이 되어버렸다. 국장으로 내가 선출되었다는 선언에 문득 바라봤던 조교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당혹감. 그리고 의문.


‘왜 쟤가 됐을까, 당연히 얘가 되어야 하는데 쟤가 뭘 잘했다고 국장이 됐을까? 고작 1표 차이로 쟤가 국장이 되는 게 맞는 걸까?’


심장을 둘러싸 애써 지키고 있었던 유리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내 입장에서, 내 선에서, 내 영역에서 최선을 다 해 신문사를 위해 일해왔는데 당신의 입장에서, 선에서, 영역 안에서 드러내지 않았다고 나를 그렇게 흘겨보는 것이 정당한가요?


당장 자취방을 구했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18만 원짜리 반지하로 구했다. 내 통장에서 할 수 있는 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쓰던 폴더폰을 버리고 당장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국장이 되면 조교님의 연락을 많이, 자주 받게 될 거라 그래서 자취방에 아낀 돈을 털어 최신이자 데이터 무제한 요금으로 바꿨다.


당신이 몰랐던 내가 있다고, 당신이 알고자 하지 않았던 내가 있다고. 그런 나를 이런 식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국장이 됐음에 책임을 다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조교님의 태도는 달라졌다. 오히려 심해지는 방향으로. 국장이 되었으니 모든 잘못의 책임을 내게 돌렸다. 기자들의 잘못도, 부장들의 잘못도, 동기며 후배들의 잘못도 모두 내게 책임을 미뤘다. 당신도 잡아내지 못한 오타와 오보를 왜 먼저 잡지 못했냐며 월요일 아침부터 불러 화를 냈고, 교수님이 잘못 이해해 다른 식으로 진행된 기획도 왜 진작 당신께 얘기하지 않아 수정조차 못하게 했느냐며 금요일 저녁 작업날 불러 화를 냈다. 감정에 못 이겨 결국 눈물을 보이는 날에는 “그래, 너는 울 수라도 있어서 좋겠다”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국장인 내 잘못이 맞으니까. 나는 편집국장이니까. 이런 얘기를 듣지 않으려면 국장인 내가 더 열심히, 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기들과 후배들이, 먼저 퇴임한 선배들이 나를 알아주고,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단지 조교님의 욕심에 부흥하지 못할 뿐이라고, 그러나 신문사는 조교님 것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줬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1표 차이로 국장이 되지 못한 내 동기에게 조교님이 내 욕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욕이라기 보단 험담이랄까. “국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니?”라며 말문을 연다는 조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대놓고 내게 욕을 하셨으면 반성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내 가장 소중한 동기에게 나에 대한 험담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알아주지 않아 분하고, 내가 무슨 이쁜 짓을 해도 결국 찾는 사람은 내 동기라는 사실에 억울하고, 고작 신문사의 조교일 뿐인 당신께 이렇게 휘둘리는 내가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웨딩홀로 달랠 수 있는 스트레스 수치를 넘어섰다. 어떡해서든 신문사를 하루하루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곧바로 자취방과 신문사 사이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모든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감사하게도 모두가 나를 응원해줬고, 조교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위로해줬고, 오히려 매일매일 그렇게 스스로를 혹사하는 나를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장이 덜 아파졌다.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옥의 스케줄이었다. 일요일 저녁 10시부터 금요일 아침 8시까지 주 5일 10시간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극한으로 치달았던 신문사 작업과 여전했던 주말 아르바이트. 강의는 출석이나 제대로 했다면 다행이고, 학과 친구들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편의점-신문사-학과-웨딩홀을 돌아다니며 서로 다른 옷과 얼굴을 입고 스트레스를 돌려막았던 22살.


국장이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국문과 학생이자, 웨딩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22살.


그러나 그렇게 벌려놓은 일들에 하나하나 정성을 쏟지 못했다. 그중 특별히 애정이 가는 일이 없이, 특별히 집착하며 나선 일이 없이, 나의 힘이 100이라면 공평하게 25씩 힘을 나눠 어느 하나에도 정점을 두지 않았다. '노력'을 어떻게 하는 건지 잊고, 아주 자그마한 '성과'조차 내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22살의 ‘나’는 이 세상 어떤 역사에서도 빈틈없이 지워졌다.


이때 얼마를 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월 250만 원 정도를 벌었지만 무슨 소용일까. 지금 남아 있는 그때의 자산이 없는데. 돈도, 능력도, 추억도, 내 존재도. 그때 벌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그때 나의 ‘자산’은 1원도, 1초도, 한 톨도, 한 방울도 없다.


내 몸이 가장 풍족했을 때, 내 마음은 가장 가난했으므로.


그렇게 돌려 막은 스트레스라는 빚을 청산하는 데 2년이 걸렸다. 국장을 퇴임하자마자 휴학하고, 1년이 지나 또 휴학을 연장하고, 그렇게 연장한 휴학이 끝나가는 지금. 22살의 나보다 24살의 나는 바쁘지 않아 돈은 없지만 내 시간을 찾았고, 여유를 생산하여 내 사람들에게 이 여유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아무리 많이 벌었다고 해도 시간을 버리고, 내 사람을 버리고, 끝내 ‘나’를 버려가며 번 돈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마저도 내게 남은 시간이 있고, 나를 기다려준 내 사람들이 있고, 죽지 않는 이상 버텨준 ‘내’가 있기에 이렇게 살아남아있는 것이다. 요즘은 거울을 볼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보며 생각한다.


“꽤 살 만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나는 가난해야 한다. 가난해야 산다. 적어도 지금은 돈을 버는 대신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면 차라리 금전적 거지로 사는 대신 시간적 부자로 살고 싶다. 그것이 ‘백수’라는 단어로 전락한다 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지금 당장은 내 마음이 시간을 자산 삼아 여유롭게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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