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내 INAE Sep 15. 2022

빌어먹을 포괄임금제

퇴직금도 포괄인 건 너무하잖아요

출판사는 박봉이라고 한다. 출판업은 단군 이래 사양산업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말하자면 입 아프다.


"학과가 어디에요?"

"국어국문학과예요."

"왜 하필 국문과예요? 아, 선생님 되고 싶어서? 아니면 기자?"

"아니요, 출판편집자 되려고요."


이렇게 말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은 딱 두 가지다. 출판사에 들어가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 싶지만 무례할까봐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느라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거나, 출판사에 들어가서 밥 벌어먹고 살겠냐 싶은 마음이 앞서 무작정 고개부터 저으며 나를 만류한다. 이를 벗어난 반응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


출판사 가면 돈 못 벌어. 모두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주변사람 중 출판사에 다녀봤거나 다니는 사람을 알거나 조금이라도 출판업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연관된 사람은 한 명도 없음에도 그들은 확신했다. 그 확신에는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출판계에 몸 담고 싶어 했는지 제일 잘 알고 있던 남자친구마저도 출판사에서 낸 구인공고를 보고 있는 내게 수차례 말했다.


"꼭 출판사여야 해? 다른 더 돈 많이 주고 연봉 많이 오르는 데도 많은데 꼭, 굳이 출판사여야 하는 거야?"


내가 몰라서 출판편집자가 되려 9년 동안 노력한 게 아니다. 내가 그것도 몰라서 출판사면 된다고 편집자가 아닌 마케터로 입사한 게 아니란 말이다. 나도 안다. 처음 면접을 볼 때 내가 적어낸 희망연봉을 보며 당시 면접관은 딱 잘라 말했다.


"이 정도까지는 줄 수 없어요. 출판계가 그래요."


그때 내가 적은 희망연봉이 2,700만 원이었다. 세금을 제한 실수령액이 한 달에 200만 원이 넘으면 좋겠어서 쓴 말 그대로의 '희망연봉'이었고, 이에 한참 못 미치는 연봉을 제시한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 일을 배워야 하는 신입이었고, 몸값이야 차차 높여나가도록 내가 노력하면 되니까. 게다가 입사한 출판사는 대표 작가나 책 이름만 들어도 10명 중 8명은 다 알 정도의 메이저 출판사인데 여기서의 초봉이 박봉이라고 해서 다른 회사의 연봉은 다를까 싶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직업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살면 되고, 그 당시의 내게 돈보다도 중요한 건 마음껏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설작가가 되고 싶다던 꿈이 비록 취미가 된다고 해도 좋아. 취미가 날 살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출판사에선 9시에 출근해 17시에 퇴근한다고 했고, 새로 얻은 자취방은 회사로부터 걸어서 1시간 거리였지만 그래봤자 집에 도착하면 18시였다. 온전한 나를 위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할 때는 책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고, 쉴 때는 책을 읽으며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그토록 꿈꿔왔던 창작가의 삶이 근로계약서에 사인함으로써 시작될 참이었다.


'포괄임금제'라고 써있었지만 어느 정도 각오한 점이었다. 포괄임금제는 구직자들 사이에서 야근을 해도, 휴일 근무를 해도 아무런 추가수당을 주지 않는 악마의 계약처럼 악명이 높았다. 여러 취업 커뮤니티를 조금만 둘러봐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포괄임금제인 회사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글이 즐비했다.


그래도 이 출판사는 면접 때 말했다. 누구보다 칼퇴근에 진심인 회사라며 절대 눈치 주며 강제하는 야근은 없다고,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만들고 싶은 것 잔뜩 만들도록 최대한 서포트해줄 거라고 홍보 아닌 홍보를 당했다. 어차피 추가수당 받을 건덕지가 없으니까 포괄임금제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특정 책이 잘 팔렸을 때의 성과급은 따로 '잘' 챙겨준다기도 했다.)


그런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구간이 있었다.


내가 처음 제시 받은 연봉은 2,300만 원이었다. 거기에, 3개월 간의 수습이 끝나면 급여가 '오를 수도 있다'는 희망이 더해졌다. 기본급이 190만 원 정도니까 공제세액은 15만 원 정도, 그럼 한 달 급여는 175만 원 정도겠다고 계산했다.


아주 단단한 착각이었다.


연봉 2,300만 원에는 기본급여 2000만 원 정도에 교통비 120만 원, 그리고 퇴직금 180만 원이 책정되어 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포괄임금제가 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태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원래 포괄임금제에 퇴직금도 포함되는 게 맞는 건가?


당연히 아니다. 대체 퇴직금이 뭐란 말인가. 퇴직금을 내 돈으로 적립하는 법이 대체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 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퇴직금은 사용자(회사)의 소유다. 그러니 1년을 채우지 않는 근로자에 대해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퇴직금을 내가 받기로 한 연봉에 포함시킬 거라면 1년을 채우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가 적립한 돈이니까 받아가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그러니까 퇴직금은 포괄임금제에 포함되어선 안 된다. 이걸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주 많이 당황스럽기는 했다. 누가 연봉을 제시 받았을 때 그 연봉을 한 해에 모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거기에 사측에서 얼마를 떼어갈지까지 생각하겠는가.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대로 도망가면 첫 출근 전에 미리 계약한 자취방의 계약금 50만 원이 날아갈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구직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좋은 출판사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앞날이 캄캄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사한 뒤의 금전적 상황은 더 최악이었다. 한 달 월급이 150만 원 정도였는데, 이중 50만 원은 월세로, 40만 원은 각종 공과금으로 나갔다. 실질적으로 한 달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은 60만 원이 남았다. 어라? 한 주에 10만 원씩만 쓴다고 생각하면 20만 원이나 남지 않는가?


결정적으로 식대가 나오지 않는 회사였다. 하루 점심식사로 1만 원씩 써나가고, 사무실엔 회의실이 따로 없어서 매주 1번 이상 꼬박꼬박 해야 하는 기획회의를 위해 회사 근처 카페로 가야 했다. 커피값이 하루에 5천 원 정도. 회사에서만 이미 1주에 6만 원이 나갔고, 다이어트한다 셈친다며 1일 1식을 하자며 집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돈이 어떻게 나갈지 모른다. 한 달 월급으로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취를 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좀 나았을까? 그건 절대 아니라고 장담한다. 본가에서 회사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본가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버스는 1시간 동안 탄다. 그리고 2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는 시간 40분. 합정역에서 파주출판단지로 가는 통근버스 1시간. 거의 3시간의 출근시간이자 퇴근시간. 심지어 퇴근시간은 퇴근길 교통체증 때문에 더 길어질 가능성이 많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야 상관 없다. 많은 경기도민들이 공감하겠지만 기나긴 이동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7시에 퇴근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20시를 넘긴다는 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면접을 보러 파주에 세 번 방문했던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 하루에 6시간 가량을 길 위에서 버리는 대신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겠는가?

- 돈을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취방을 구하겠는가?

- 돈을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중고차를 사겠는가?


이중에 자취방을 고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이었다. 당시 내 수중의 여윳돈이 500만 원이었다. 이 돈으로 중고차를 사면 앞으로 기름값이며 보험료며 나가야 하는 돈은 물론이거니와 차를 사면 그걸로 끝이었지만, 임대차계약을 하면 월세가 나갈지언정 보증금은 나중에 돌려받는다. 보증금 5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50만 원. 적금을 든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생각에 말도 안 되는 포괄임금제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함으로써 첫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1년 뒤 돌려받는 보증금 500만 원과 더불어 내게 남은 희망으로 청년내일채움공제가 있었다. 2년 동안 매달 12만 5천 원씩 납입하면 기업과 정부의 지원금을 더해 2년 뒤에 1,200만 원으로 돌려주는 정책이었다.


그랬다. 내일채움공제가 있었다. 어차피 대기업 갈 생각도 없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중소기업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전부 누려주겠다며 지원서를 넣을 때부터도 내일채움공제를 지원하는지 꼭 확인했더랬다. 이 출판사도 내일채움공제를 지원해줬다. 그건 좋다. 하지만 막상 내일채움공제까지 필요서류를 제출하던 시기에 또다시 눈 앞이 캄캄해지더랬다. 생활비를 아무리 아끼고 아낀다고 해도 12만 5천 원을 매달 납입하기 시작하면 정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무소유를 말씀하시는 스님들도 이렇게까지 없진 않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래도!


꿈이지 않았는가. 책 속에 파묻혀 오롯이 나와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사는 것. 그게 꿈이지 않았는가.


무조건 돈을 써야만 하는 무수한 약속을 잡지 않으면 된다. 아무도 안 만나면 된다. 꼭 점심시간에 외식을 할 필요 없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면 된다. 당장의 부족함을 주변인들에게 양해해달라면 된다.


평생 이 연봉이 아니라는 걸 안다. 3개월 간의 수습기간이 끝나면 연봉이 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2년 뒤에 내일채움공제를 채워 목돈을 받을 수 있다.


딱 2년만. 그렇게 2년만 눈 딱 감고 다니다보면 문득 눈을 떴을 때 숨통이 트일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퇴사를 말했다. 왜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제가 일하는 게 이 회사에 민폐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업무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21년 9월 1일 수요일. 첫 출근날 파주출판단지 초입의 비보호 좌회전 표지판. 이젠 아무에게서도 보호 받을 수 없는 사회인이 된 것 같은 뿌듯함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취업과 첫 퇴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