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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Sep 19. 2022

나를 구하기 위한 퇴사

태어나 처음 연필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줄곧 나는 글을 쓰는 창작가가 되고 싶었다. 창작가로 먹고 살 수 없다면 창작가의 곁에라도 서성이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만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독창적인 창작가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많은 것을 읽고 배울 수 있는 현명한 독자이고 싶었다.


세상일이 생각대로 사는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작가가 되고 싶었고, 그보다 먼저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다며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나 결국 첫 직업은 그토록 바랐던 글을 쓰고 고치는 직업이 아닌 글을 활용한 비쥬얼 콘텐츠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됐다. 이력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꿈에 가닿고 싶다던 목적으로 살지 못했다. 오히려 꿈을 위해서라는 합리화를 앞세워 삶을 살아내기 위한 생존수단으로 여태까지의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태생적으로 나는 독하지 못했다.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하는 일이 없었고, 좋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고생보단 현재의 고생을 회피하기 위해 현재의 좋은 점만 바라봤다. 친오빠가 다이어트를 한다며 저녁을 굶고 있을 때, 그 앞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마냥 내가 먹을 삼겹살이 더 늘었다며 좋아했다. 조금이라도 성적을 높여 더 좋은 대학교, 더 이름 있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 친구들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어느 대학교에 들어가기보다 국어국문학과 학생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남들만큼 철저하고 진득하게 공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평범한 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서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공부와 좋아하는 활동만 했다.


그중 제일 헌신했던 활동이 바로 학보사였다. 처음에는 출판편집자가 되는 길에 발판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으로 입사신청서를 넣었다. 기자로서 글을 쓰고, 선배들에게 교정을 받고, 또 선배가 되어 후배들의 기사를 교정하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님들의 피드백도 받게 된다면 내 글은 더 정제되고 글감을 찾고 바라보는 눈이 뜨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막상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건 기사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신문 지면의 디자인이었다. 다른 학교 학보사 기자들의 말로는, 내가 다닌 학보사처럼 매주(시험기간과 방학을 빼고 정말 말그대로의 '매주') 빠짐없이 8면으로, 그것도 가장 사이즈가 큰 대판으로 신문을 만드는 곳이 없다고 했다. 매주 두 번의 기획회의가 있었고, 기획과 취재, 원고 작성과 지면 편집까지 모두 학생기자들이 손수 만들어야 했으므로 학보사 기자들은 편집국에 살다시피하며 거의 매일 출근했다. 주말까지 이어진 밤샘 작업은 당연했다.


지면의 제목-본문-광고나칼럼, 이렇게 3단으로 구성된다. 본문에 들어가야 하는 원고량은 보통 A4용지를 꽉 채운 3장 정도였고, 사진 두어장이 추가된다.


A4용지 3장을 꽉 채워 쓴다는 건 사실 생각보다 엄청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글을 써본 적이 전무한 보통 학생들(특히 대외활동 스펙을 쌓기 위해 입사한 이과계열 학생)의 경우 '기사'는 물론 글 자체를 어떻게 시작하고 전개하는지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3장이란 분량을 채우기에만 급급하곤 한다. 대개는 그럴 때 관련 기사의 본문을 수정 없이 그대로 긁어온다거나 나름의 정리 없이 그저 타이핑을 하기에만 바빠 조사가 맞지 않거나 한 문장이 한 문단일 정도로 지나치게 긴 글이 되곤 한다.


나는 그런 훈련이 어느 정도(사실 아주 잘) 된 케이스였다. 고등학생 때 논문 수업을 들었다. 주제를 잡고,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최대한 많이 찾아 정리한 다음, 그것을 정돈된 글화하는 작업을 학생 때 내내 했기 때문에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자 활동에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로도 나는 당시 학보사 내에서도 글을 잘 쓰는 기자에 속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기사 쓰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므로 기사 자체의 퀄리티를 올리는 것보다 기사가 실리는 지면의 디자인에 더 욕심이 생겼다. 요즘 같이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적어도 내가 싣는 내 지면의 내 기사가 예쁘게 보여지기라도 해서 제목만이라도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기사를 빨리 쓰고 지면 디자인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지면이 흑백면이어도 상관 없었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후배들도 그동안 우리 편집국에서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흑백면을 디자인하고 있는 내 모습을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좋아해줬다. 후에는 취재와 동시에 지면을 디자인하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디자인 감각이 썩 나쁘지 않은 내 모습을 아는 지인들이 종종 디자인 일을 맡기곤 했다. 작게는 한 기사의 삽화에서 크게는 연줄이 닿은 교수님의 크라우드펀딩 게시물에 쓰일 카드뉴스까지. 그렇다고 해서 디자이너로 전향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은 없었지만 나름 자부심은 있었던 것 같다. 알음알음 번 돈으로 60만 원짜리 디자인 툴 수업을 듣고, 이후 받은 수료증을 이력서에 꼬박꼬박 적어냈으니까 말이다.


'UX/UI 디자이너 직무를 제안합니다'

'온라인 마케터 직무를 제안합니다'


요령도 없고, 요령이 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내 이력서는 누가 봐도 비쥬얼 콘텐츠를 만드는데 특화된 사람이었다. 디자이너나 마케터 위주로 커리어 제안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꿈이 있다며, 종이를 글로 채우는 사람이고 싶지 화면을 그림을 채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며, 출판편집자니 소설작가니 나는 곧 죽어도 그거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출판사에서의 마케터 제안을 거절하고 이력서 쓰는 요령을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마케터가 됐고, 하루종일 인스타그램에 올릴 카드뉴스를 만들고, 마케팅 일정과 기획을 짜는 일을 했다. 그리고 퇴사했다. 왜?


힘들었으니까.


턱 없이 부족한 급여는 나의 욕심을 채워주지는 못해도 삶은 살아갈 만큼은 됐다.

보잘 것 없는 복지도 언젠가 열심히 일하다보면 미약하게나마라도 올라갈 연봉으로 채울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이 회사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도, 악의적으로 나를 괴롭히거나 고립시키려는 사람이 없는 한(실제로도 직장 내 괴롭힘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다. 스며들거나 익숙해지거나.


나를 견딜 수 없이 괴롭힌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창작하는 재능이 있다'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나 스스로에게서 느끼는 배신감과 사실은 내게 '창작하는 재능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왔던 어리석은 내게서의 한심함이 나를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만들었다.


처음이기에 서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 되게 괜찮다고 생각했던 디자인인데도 계속해서 반려가 되고, 반려가 되지 않도록 설득하거나 어필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 뭔지, 상사가 원하는 디자인은 또 뭔지 모르겠어도 '처음이니까, 디자인 일을 원래 하던 사람도 아니었고 이제 막 처음 가진 직업에 능숙한 사람은 없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루종일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봐도 백지에 선 하나 그리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고, 침대에 누워서도 디자인만 생각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있던 마케터가 예비로 만들어놓은 콘텐츠는 이제 다 떨어져 가는데, 내가 앞으로 올려야 하는 콘텐츠는 제대로 된 기획조차 짜지 못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기획회의를 했다. 회의 때 브리핑해야 하는 기획을 짜고, 레퍼런스를 찾고, 그걸 정리한 회의자료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 외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은데도 나는 콘텐츠 디자인 아이디어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다.


점점 우울해졌다. 매일매일을 눈물로 보냈다. 마음은 항상 무거웠다. 월별 콘텐츠 업로드 리스트엔 공란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더 잘해야겠다는 긍정적인 자극보다 나는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고, 못해내고 있고, 앞으로도 못해낼 것이라는 부정적인 자극이 쌓여갔다. 그 부정은 나 자신에게 대한 부정으로 번지더니 곧 주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돌변했다.


- 하고 싶은 기획과 디자인과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서포트한다면서 내가 내는 디자인마다 전부 까내리기 바쁜 상사. 나빠.

- 쌩 신입을 뽑아놓고 어느 정도의 적응기간도 주지 않은 채 자기들과 같은 수준의 질과 양을 요구하는 선배. 나빠.


그러나 그래봤자 모든 게 내 선택이었고, 내 잘못이라는 걸 외면할 수 없었다.


- 내가 별로인 디자인을 가져가서 설득도 못해놓고 뭐가 나빠. 내가 나빠.

- 신입이라는 타이틀에 매몰돼서 더 잘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내가 더 나빠.


제일 나쁜 건, 나다. 소설작가가 되고 싶다면서 대학에 더 유리하게 가야 한다는 말에 장래희망을 바꿨고, 그러면서 출판편집자가 간절하게 되고 싶었는데도 자잘한 경험과 변변찮은 성과에 심취해 이력서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고, 출판편집자가 아니어도 출판사만 들어가면 된다는 합리화에 빠져 냉큼 마케터라는 자리를 주웠다.


애초에 잘할 생각이 있었다면 노력을 했을 것이다. 노력할 생각이 있었다면 돈도, 시간도, 그 어떤 것도 부족하다며 이것저것의 조건을 따지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내 기저에 깔린 핑계는 '나는 되고 싶지도 않던 마케터를 당신들이 기회를 줘서 억지로 하고 있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디자인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죄책감과 마케팅 일정에 차질을 빚은 내게 퍼부어질 상사의 질책에 대한 압박감에 밤마다 절규하듯 눈물을 흘릴 때도 나는 내심 아쉬웠다.


'나는 평생을 소설작가를 꿈꿔왔던 사람인데,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또 한 번의 절규.


'나는 평생을 소설작가를 꿈꿔왔던 사람인데, 사실은 취미를 꿈으로 착각한 바보였던 거야.'


그 순간 애써 단단한 믿음으로 쌓아왔던 내 안의 성벽이 무너졌다.


나는 재능이 없다. 그건 내게 단순히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없었던 거라는 상실감으로는 표현이 안 된다. 내가 굳게 믿고 있던 '내가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글에 대한 재능'이 사람들의 의미 없는 호의와 칭찬으로 이뤄진 빈 껍데기였다는 사실은 그 껍데기로 살아온 내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소설작가가 되겠다던 어린 날의 나의 재능, '재밌는 소설이네!'

출판편집자가 되겠다던 덜 어린 날의 나의 재능, '글 잘 쓴다!'

마케터가 되겠다던 그날의 나의 재능, '너 디자인에 감각 있구나!'


내 삶을 지탱해준 세 개의 기둥이 무너지고, 나는 더 이상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의지도, 믿음도,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런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 나를 어디로든 데려갔으면 했고, 데려가지 못하면 다치게 해주길, 다치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를 이 세상에서 없애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것만이 나를 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너진 내가 한 회사의 마케터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것만큼 회사에 민폐를 끼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의욕조차 없는 내가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할 수 있는 게 어딨겠냐고. 과장님의 눈빛에서도 읽었듯,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자르지 않고 억지로 데리고 있을 바엔 빨리 버리고 새 사람을 구하는 게 이 회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나는 그렇게 첫 퇴사를 했다. 그날 아주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자취방으로 향하는 걸음 내내 나는 울었다. 울면서 주문처럼 외웠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퇴사는 꿈도, 희망도 잃은 나를 구하고 싶은 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2021년 10월의 어느 날 퇴근길.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낙엽의 떨어짐은 직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너는 잘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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