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만큼의 무게
서예를 배울 때였다.
그곳의 평균 나이는 70대 중반이다. 그 남아도 내 중년의 나이로 평균 연령 숫자가 내려갔을 거다. 덕분에 그곳에 가면 사회에서는 무게 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내가 서예반의 강의실 문을 여는 순간 나 자신이 고등학생 정도로 느끼게 되는 마법의 시간이다.
그만큼 인생의 대선배님들이 계시는 덕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분들의 얘기만 듣고 있어도 종종 마음에 울림이 일어나곤 했다. 그분들은 서로 나긋이 건네는 농담마저도 인생의 깊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그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에도 어려진 나는 화선지 위에서 지긋이 미소만 띄우곤 했다.
오늘은 그 대화 중에 나를 깨운 말이다.
그분들의 대화를 엿듣다 보면 다들 경제적 수준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경제활동을 하는 건 아니기에 나가는 세금이 반가울리 없었을 것이다.
그 중 세금고지서를 미워라 꼬집는 말이 들렸다.
"아휴~ 이번에 세금 내라고 고지서가 나왔네.
아니 그런데 세금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나온 거야~? 세금으로 나가는 돈이 정말 아깝네~"
누구나 생각하고 흔히 듣는 말이라 내 한쪽 귀로 흘려 나가려는 중 저쪽에서 받아주는 듯 그러나 단호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세금 내는 거 아깝다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서울 해방촌에서 살 때 그 어려운 시절 아내와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봤어요.
늦은 저녁 서울을 환하게 빛내는 수많은 집들의 불빛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지요.
'아......... 서울에 이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 이중에 내 집이 하나 없는게 서럽고 안타깝다.'
그땐 너무 어려워서 집 갖고 세금 내는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였어요.
세금 내는 거 행복한 거요. 그만큼 내가 갖은게 있단 말이에요.
없는 사람들은 세금 내며 살고 싶어도 오히려 정부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어요.
나긋나긋한 타이름에 나까지 절로 배움이 일어났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서예반에서 80대 중반의 가장 어르신이다. 어려운 시공간들을 살아오셨지만 지금은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시다 보니 없는 자리 있는 자리를 모두 겪은 깊이 있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찌 보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이다. 지금 시대의 우리는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덕분에 전 세계 20% 이내의 부를 누리고 있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이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 80%의 사람들이 상상만 하는 황금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어렵다고 해도 그 황금의 무대 위에서 어려운 것이다. 진흙바닥에서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괴로움의 질이 다르다.
이렇게 운 좋은 세상에 태어난 나.... 나 역시 월급 명세서에 찍혀 공제된 세금마저 내 밥그릇에서 공짜로 퍼주는 것 마냥 아까워한 적이 있다. 이제는 내가 받는 자가 아닌 주는 자임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예반 회장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