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㒣報)
나는 어린 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회의 당연한 이치가 생각보다 일찍 깨졌다. 대학 때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하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이 정의의 핵심이라 생각했던 법 앞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에 대한 부실한 복지 뒤에는 학장의 비리 의혹이 있다는 사실이 불거지며 대학 생활의 반 이상을 학생운동으로 보냈다. 내가 그 결실을 누리지 못해도 후배들이 누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새벽이슬 맞으며 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래도 권선징악의 마법을 믿었기에 꿋꿋이 견뎌냈다.
힘든 하루하루의 끝이 보일쯔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오히려 학생들을 위해 지지해주던 교수님 몇 분이 구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유는 한마디로 학생들을 사주하여 물의를 일으킨 죄목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은 그냥 시시한 소문쯤으로 버리려 했으나 그게 순식간에 현실이 되어 나는 평생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법원과 구치소를 여러 차례 오가며 교수님을 대면해야 했다.
강의실 책상에 앉아 흥미로운 과목의 강의를 듣고, 강단에서 열의로 강의하며 컴퓨터 앞에서는 학생들의 디자인 작업물을 세심하게 봐주던 학생과 교수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지고 죄수와 면회자의 모습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러한 것이 정의로운 법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불합리한 고초를 겪은 몇 년 후에야 권선징악의 마법이 서서히 드러났지만..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법이라는 회초리로 선량하게 살아보겠다는 자들을 매질해야 했는가? 온갖 꼼수로 선량한 자들을 밟고 살겠다는 자들은 왜 보듬었단 말인가? 법이라는 것은 의롭다가도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 없었다.
최고의 명예 직함 중 하나인 교수에서 사회의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죄수번호를 달고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 인간으로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장 가족들의 생계는 물론이고 감옥살이가 끝난 후의 일상까지 어떤 희망이 보이기나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 중에도 늘 의연한 모습으로 일관되던 교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겪으며 어떻게 그런 평온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앞으로 나에게 닥칠 혹시 모를 인생 재앙이 온다면 나 역시 그런 의연함을 고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컸다.
"삶이 고되고 힘들 때면 이 세상의 모든 짐이 네 어깨에만 올려질 거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너 안에서 세상을 보지 말고 너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광활한 우주에서 너를 보면 네가 앓고 있는 그 무엇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은 졸업 후 나 자신이 어두운 감정에 휩쓸릴 때마다 나를 다시금 단단히 붙잡을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마법이 된다. 지금도 나는 수시로 나를 우주에서 바라본다. 지구 안의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희로애락들... 그중 우주 먼지만한 나의 속에서 일어나는 바람 같은 그 감정들.... 파란만장한 내 인생을 통틀어도 억겁의 우주 역사 속에서는 찰나에 찰나를 기록할 시간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 표현했듯이 나를 안은 이 거대한 지구도 우주에서 볼 땐 작디작은 푸르점 하나.
그 안에서 서로들 내편 네 편 내 나라 남의 나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이런저런 사람에 의한 경계와 경계들.... 옳다 그르다 편견에 편견들...... 실제로 가장 객관적인 진리는 그런 우리 모두 푸른 점 안에 의지한 우주 물질 중에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엇하나 대단한 것도 없지만 무엇하나 하찮은 것도 없었다. 나를 여러 잣대로부터 가볍게 했던 이 말....'우주에서 너를 봐라.'
교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