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윤이 Aug 30. 2023

Chap.04 희귀질환으로 인한 인생의 제약

보통 사람들이 20대에 찬란한 미래를 꿈꾸듯이 나 또한 그러했다. 재수를 하고 들어간 대학에서 높은 성적을 받고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단순하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 나의 소망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희귀질환에 걸리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2015년 중반쯤에 건선이 발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피부 증상이 건선인지 알지 못했었다. 초기 증상은 아주 크기가 작았고 가려움증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학교를 계속 다녔다. 하지만, 2016년 2학기가 막 시작했을 때 난 결국 휴학계를 신청했다. 


내가 휴학을 한 이유는 질병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전과를 하면서 새 학과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우울감과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그때 학교에서 조별과제가 있는 과목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건선이라는 질병이 나에게 하나의 대피소를 만들어준 걸수도 있다. 2학기가 시작하면서 건선의 크기가 점점 커져서 이마 부위를 넓게 침범했고 턱 쪽에도 건선이 생겼다. 외모가 이렇다 보니 화장으로도 가려지지가 않아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얼굴에 뭐가 났다고 지적질을 해서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동네 피부과에서 치료에 진전이 없었고 학교를 다니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많아서 결국 개강한 후에 휴학계를 신청했다. 


이후 서울아산병원을 가서 진단을 받았고 국립중앙의료원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때 내가 휴학을 신청한 것은 결과적으론 잘한 일이었다. 나는 거의 대학병원을 2주에 한 번씩 다녔고 집에서 거리도 꽤나 멀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병원을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반년을 휴학하여 엇학기를 다녔고 나중에 학기를 맞추기 위해서 반년을 더 휴학했다. 재수해서 대학을 들어갔기 때문에 남들보다 1년이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휴학을 하면서 삼수한꼴이 되었다. 


2019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나는 바로 대학원을 입학했다.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학과공부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대학원을 고려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대학원에 관심이 생긴 것은 대학교 4학년 때 졸업논문을 진행하면서부터다. 연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재밌었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뒤늦게 연구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대학원 준비도 부랴부랴 간신히 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원에서 나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대학원에 대해서 그렇게 알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대학원이 학생을 노예로 부려먹는 곳이고 교수들이 아주 사악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한국이 아니라 중국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나의 상황이 예외라고 생각했다. "중국"이란 국가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응은 얼마 없었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시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기 때문에 학비, 보험료, 기숙사비 등 모두 내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았고 정부에서 다달이 약 50만원 정도의 생활비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내 지도교수는 김박사넷에서 볼 수 있는 여타 다른 교수들과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내가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배려해주는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때 이미 화농성 한선염에 걸려서 겨드랑이 통증을 상당히 느끼고 있었을 타이밍이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서 정보를 찾았고 내 증상이 표피낭종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경절 기간이 연휴가 길고 한국에서도 한글날과 추석이 껴있었기 때문에 내가 한국을 갔다올 타이밍은 이 시점이 딱 적절했다. 교수에게 말한후 1주일의 휴가를 얻어서 한국을 나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이때쯤에 아산병원 예약도 가능했다. 


한국에서 피부과 교수님에게 "화농성 한선염"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고 이소티논이라는 약을 처방받아서 왔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분명히 교수와 1주일 휴가를 받고 한국을 들어오기로 합의를 봤는데 교수가 뜬금없이 추석 연휴에 랩미팅을 실시했고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저격성 멘트를 위챗 단톡방에다가 올렸다. 구체적인 내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고 랩실에 하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인지 모르는 중국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일은 분명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바로 중국인 교수에게 문자를 보내서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본인도 뭐가 느낀게 있었는지 내가 귀국한 이후 따로 면담을 했다. 나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람 나름대로 나에게 배려를 해준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배려"라고 적기는 했으나 내가 이 일을 당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이것이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과거를 되돌아 봤을 때 그 교수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이 나름 "배려"라고 내가 추측하게 되었다. 


건선, 화농성 한선염과 같은 질병은 이처럼 나의 인생을 참 꼬아도 놨다. 건선으로 인하여 학교를 휴학해야 했고, 화농성 한선염으로 인하여 연구자가 되길 원했던 나의 꿈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위에 서술했듯이 교수가 나에게 어느 정도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은 사실이었고 나도 그 사건 이후로 좀 더 랩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결국 자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분명 저 사건에 대한 나의 원한이 있었다. 


결국 자퇴서를 날리고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자퇴서를 처음 받은 날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 내가 너무 허황된 꿈을 꿨구나' 하고... 이후 중국에서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져서 학교가 온 난리가 났다. 자퇴할 시점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었다. 당시 중국정부장학금을 받고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자퇴를 하게 되면 그 다음 장학생 TO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때문에 중국이 강력한 봉쇄를 실시하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탈출러쉬가 이어지게 되면서 나와 함께 장학금을 받았던 친구들도 대부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이후 나는 유학을 다시 한 번 꿈꾸게 되었다. 내가 대학원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귀국한 이후 관절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일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한 번은 시청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한 일이었고 내가 빠르게 일을 배웠기 때문에 하는데는 수월했지만 무거운 것을 날라야 할 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다보니 어깨와 목이 너무 아팠다. 나는 그때 목디스크 판정을 받아서 물리치료를 한동안 했었다. 그리고 발 통증도 점점 심해졌다. 


체력도 얼마나 저질인지 조금만 걸으면 피곤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지금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건선관절염의 전조증상이었다. 거기다 화농성 한선염으로 인한 고통이 상당했기 때문에 아산병원도 지속해서 다녔다. 당시에 이소티논을 복용중이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피검사도 실시했다. 나는 적절한 직업을 찾기 힘들어서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 알바몬을 통해서 재택알바를 구해서 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직업 특성상 벌 수 있을 때는 직장인 수준으로 많이 벌었지만 일이 없을 때는 정말 소득이 적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2년을 넘게 했다. 


나는 최대한 내가 가진 환경에서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블로그 리뷰단도 했었고 유튜브를 검색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봐서 많이 도전했다. 남들에 비하면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유학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2022년부터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미국이나 스위스, 독일 등의 나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내 마음 속에는 학위에 대한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원도 고려는 했으나 결국 선택하지 않은 것은 김박사넷 등을 보니 내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 몸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 보니 주기적으로 병원 진료를 봐야 하는데 나에게 그렇게 배려해주는 곳이 얼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가 배려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학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 몸이 멀쩡해 보이기 때문에 나만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부분에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내가 가고자 하는 분야에서 좀 더 심도있게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독일이나 스위스는 학비가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미국은 펀딩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내 영어실력이 형편없었고, 프리랜서로 일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엘츠 점수를 만드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나는 기본적인 영어회화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킹 점수를 6.0 이상을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는 10월부터 원서를 쓰기 시작했고 올해 1월에 3곳으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3월에 한선염이 심해지면서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고 5월에는 건선관절염을 진단받았다. 이미 오퍼를 다 받은 상황에서 새로운 질병에 걸리니 난감해졌다. 거기다 화농성 한선염은 관리하기가 힘든 병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병원 방문이 요구되었다. 최근에 병원을 다녀왔는데 피부과 선생님은 나에게 2-3주에 한 번씩 병원을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온 공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설사 내가 그 기회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이제 안정적인 직장을 다녀야 하는데 2-3주에 한 번씩 휴가를 내서 병원을 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거기다 내 병이 특수하다 보니 여러 가지 제약이 생겼다. 우선, 미국이나 스위스는 병원비가 비싸기 때문에 내가 가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학교보험으로 병원비는 커버될 수 있지만 약값은 보험 혜택이 적다. 생물학적 제제를 들어가게 되면 약값이 어마어마 할텐데 도저히 내 예산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교수님은 생물학적제제를 진행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5월에 진단을 받았으므로 6개월 이상 투약을 해야 생물학적제제가 90% 보험이 가능하다. 또한, 진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6개월은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결국 두세달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1년을 미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해서 빨리 학위를 따서 내가 이러한 질병을 가지고 있어도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질병때문에 내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이 원망스럽다. 내 몸이 정상적이었다면 병때문에 유학을 가느냐 한국에 남느냐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학을 가서도 병때문에 마음 한켠에 큰 짐을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을 갔다 온 후 심란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유학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우선 현재 상태가 몇 개월 동안 급성기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지금 다녀오는게 나을 것 같고, 하루 빨리 학위를 따야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내 병이 갑자기 심해질까봐 두려움은 있다. 그리고 한국 보험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출국하게 되면 한국의 건강보험이 취소되고,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생물학적 제제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험을 단행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이 변화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느낀다. 만약, 내가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면 앞으로 이런 기회를 또 맞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쳤을 때를 상상하면 내 삶은 더 희망찬 삶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고 암울한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내가 오퍼를 받았던 1월만 해도 건선관절염이란 진단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이러한 일이 나에게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Chap.03 화농성 한선염, 왜 지랄같은 병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