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은 책의 페이지를 부드럽게 감싸며 은은한 황금빛을 더했다. 바람은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스치며 속삭였고, 그 순간 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단어들은 잎사귀처럼 흩날렸고, 문장들은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서로 얽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공원의 고요는 책의 세계와 어우러져 두 겹의 평화 속으로 인도했다. 글자마다 담긴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넘실대는 감정이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다.
벤치에 앉아 읽는 책은 내게 말을 건네는 시간의 조각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친구처럼 다가왔고, 그들의 얘기는 바람에 실려 곁에 머물렀다. 한 구절, 한 문장이 공원의 풍경에 스며들며 새로운 빛깔을 만들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저 멀리 서는 연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고요 속에서 멈춘 듯했다.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상상 속의 미래를 동시에 살아가는 이 순간이 신비로웠다.
다시 책을 펼치며 생각했다. 이 벤치는 나무 위의 자리일 뿐이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책은 위로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나를 다른 나로 만들어 주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읽은 책 한 권. 그것은 한 오후의 시간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작은 영원이었다. 페이지를 덮고 공원을 떠난 후에도, 그날 읽었던 이야기와 풍경은 나의 일부로 남아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