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감기가 찾아올 때

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192

by 은파랑




마음에도 감기가 찾아올 때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주저하지 않고 병원을 찾는다. 열이 나면 체온계를 꺼내고 기침이 나면 감기약을 찾는다. 하지만 마음이 아플 때는 대개 혼자 조용히 참는다. 감정이라는 것은 병이 될 수 없다는 듯, 아니, 아파도 아픈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듯.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마음에도 감기가 찾아온다.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아주 조용히


이 감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니고 콧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다. 대신 일상에서 반짝이던 작은 기쁨들이 점차 무채색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좋아하던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평소라면 웃었을 농담에도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침이 무겁고 저녁이 외롭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의 층위들이 숨어 있다고 했다. 감정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성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몸속에 침입해서 일으키는 생리적 반응이지만 마음의 감기는 내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시작된다. 이는 스트레스, 외로움, 상실 혹은 아주 사소한 오해 하나로도 발생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경도 우울 상태(Mild Depression)’ 혹은 ‘정서적 탈진(Emotional Exhaustion)’이라고 명명한다. DSM-5(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는 명확한 증상을 중심으로 우울 장애를 분류하지만 감정의 감기는 경계선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아프다고 하기엔 멀쩡해 보이고 괜찮다고 하기엔 마음이 붓는다. 어느 날 갑자기 울컥 눈물이 차오르고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조이기 시작한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 감기는 뇌의 신경전달물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물질들은 기분을 조절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스트레스가 계속되면 뇌 속 시냅스 사이에서 이 물질들의 전달이 불균형을 이루고 이는 곧 감정의 흐름에 이상을 일으킨다. 기압이 급격히 떨어질 때 비가 오는 것처럼 마음에도 조용한 장마가 시작된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신경화학적 이상(neurochemical imbalance)’이라고 부르며 실제로 MRI나 PET 촬영을 통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의 뇌에서 특정 부위의 활동이 감소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감정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체와 연결된 분명한 생물학적 현상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했지만 반대 역시 성립된다. 현대 의학에서는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이라고 설명한다. 만성 피로, 소화불량, 면역력 저하, 심지어 심혈관 질환까지도 스트레스와 정서적 고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마음의 감기가 몸 전체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는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슬픔이나 스트레스를 겪은 사람들에게서 면역세포의 활동성이 현저히 낮아졌음을 보여준다. 마음의 상처가 몸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감기는 고장이 아니다. 그것은 신호다. “이제 좀 쉬어야 한다”라고, “너 자신을 돌아보라”라고 조용히 알려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래 멀쩡한 척, 괜찮은 척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참아온 울음을 묻어두고 바쁜 일상에 나를 내던진 채 잊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인문학자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며 ‘너와 나’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고 마음의 감기는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혹은 ‘나’ 자신과의 관계가 끊겼을 때 더 깊어진다. 그래서 이 감기를 치유하는 방법은 곧 관계를 회복하는 것, 자신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의 감기는 약처럼 간단한 처방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온기 그리고 정직한 관심을 필요로 한다. 때론 한 줄의 문장, 한 사람의 목소리, 나를 향한 따뜻한 눈빛 하나가 시작이 될 수 있다. 햇살이 들던 어느 오후, 묵혀 두었던 편지를 꺼내 쓰는 것도 방법이고, 너무 무거운 짐은 당분간 내려놓는 것도 괜찮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말한다. “취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가장 큰 용기다.”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는 순간 이미 치유는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조용한 처방전이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어떤 이유로든 마음이 무겁고 눈물이 말라 있다면 여기 이 글들이 작은 손수건처럼 당신의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눈물 닦아줄 사람 하나 없는 이 밤에 마음에 감기가 찾아와도 괜찮다고, 그 또한 삶의 한 계절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는 이 감기도 지나가리라. 다시 웃을 수 있으리라. 마음의 체온이 돌아오고 내 안의 햇살이 새어 나오기를. 이 글이 당신의 조용한 회복의 시작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은파랑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에게도 하루 1시간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