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욕을 할 수 있고, 누가 욕을 용서받지 못하는가
어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말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린다.
“상스럽다.”
이 짧은 말은 언어의 품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낮추는 낙인이다. 말투 하나로 억양 하나로 어떤 이는 ‘천한 사람’이 되고 어떤 이는 ‘무례하지만 솔직한 사람’이 된다. 부당한 차별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시작에는 ‘욕’이 있다. 그리고 욕을 누가 하느냐, 누가 하면 안 되느냐, 누구의 욕은 유머가 되고 누구의 욕은 비난이 되는지에 대한 계급의 언어학이 있다.
"말하는 게 참 상스럽네."
이 말은 종종 여성을 향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층 여성, 혹은 노동하는 여성, 혹은 말을 억누르지 못하는 여성을 향한다. 같은 욕이라도 어떤 남성이 하면 "거침없는 스타일"이라 불리고 어떤 여성이나 가난한 이가 하면 "천박하다"라고 불린다.
여기서 ‘상스러움’은 언어 습관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적 우열감의 표지다. ‘상스럽다’는 말은 그 사람의 교육 수준, 가정환경, 성별, 심지어 도덕성까지 판단하는 기제가 된다.
욕이 아니라 욕을 한 ‘사람’에게 혐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말투’를 중요시한다.
정중한 말투, 높임말, 완곡어법은 교육받은 자의 상징이 되었고, 직설적이고 거친 말투는 ‘배운 티가 안 나는’ 사람의 말로 여겨진다. 말투는 신분을, 계급을 그리고 ‘사람의 급’을 나누는 잣대가 된다.
정중하지만 교묘하게 사람을 깎아내리는 고급 언어는 ‘예의 바름’으로 포장된다. 반면 감정에 충실하지만 날 것이 섞인 욕은 ‘품위 없음’으로 낙인찍힌다. 즉 진실함보다 형식이, 감정보다 체면이, 사람보다 계급이 우선된다.
욕이 정당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그 말이 옳았는지가 아니라 그 말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선 후기 양반 계층은 욕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적 언어에서는 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적 공간에서는 하인이나 종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욕은 계급을 재확인하는 행위였고 감정이 아닌 권위의 언어였다.
하층민이 주막에서 내뱉은 거친 말은 ‘천한 언어’로 분류되었고 상류층이 양반가에서 쏟아낸 욕은 ‘통제된 분노’였다. 욕은 이미 오래전부터 권력의 구조 안에서 분류되고 통제되어 왔다.
‘상스럽다’는 말은 품위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귀천을 규정하려는 계급적 언어 통제의 결과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SNS에서 유명인이 욕을 하면 “솔직하네”라는 반응이 따라오고 무명인 혹은 사회적 약자가 욕을 하면 “왜 저렇게 무식하게 구냐”는 평가가 붙는다. 상사는 회식 자리에서 욕을 섞어 분위기를 띄울 수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외침은 ‘무례하고 상스럽다’며 통제당한다.
이중 기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성이 욕을 하면 ‘거침없다’고 하고 여성이 욕을 하면 ‘여자가 왜 저래’라는 시선을 받는다. 이는 언어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성별 권력과 계급 권력의 위계를 드러낸다.
때로 가장 절제된 언어는 가장 큰 위선을 담고 있고 가장 거친 욕은 가장 깊은 진심을 품고 있다. 욕은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이다.
‘상스러움’이라는 말은 욕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람 자체를 깎아내리기 위한 사회적 도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욕이 나왔는가?
욕을 막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의 욕은 용서되고 누구의 욕은 지워지는가?
욕은 누군가에겐 해방이지만 누군가에겐 형벌이 된다. 말은 평등하지만 말의 평가는 불평등하다.
‘상스러움’이라는 낙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언어의 겉모습만으로 사람의 깊이를 재지 않아야 한다. 욕은 감정의 언어일 뿐이며 계급이나 품격의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묻자.
상스럽다고 말했던 욕 속에 담긴 현실의 절망은 무엇이었는가.
무례하다고 외면했던 말투 속에 담긴 간절함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욕을 단죄하는 대신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삶의 맥락을 들어야 한다.
욕은 천한 것이 아니라 진짜 말이다.
낙인이 아니라 목소리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