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관계는 왜 나를 힘들게 하는가

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73

by 은파랑




이 관계는 왜 나를 힘들게 하는가


가끔 소소한 말 한마디에 심장이 무너진다. 누군가의 무심한 눈빛, 대화 속 잠깐의 정적, 지나치듯 던진 말이 하염없이 곤두서게 만든다. 왜 이토록 쉽게 상처받는 걸까. 왜 어떤 관계는 우리를 살게 하고 또 다른 관계는 서서히 마르게 할까. 물음 앞에서 우리는 종종 침묵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진실이 흐르고 있다.


심리학자 존 볼비(John Bowlby)는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애착'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유년기, 부모와 맺는 정서적 연결이 이후 우리가 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결정한다. 어린 시절 충분히 안전하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며 상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자신을 무너뜨린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반복될수록 점점 ‘관계’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이 가장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자주 잊는다.


‘나는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라는 변명은 언제나 가장 늦은 후회 뒤에 온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이를 '의도된 메시지와 해석된 메시지 간의 간극'이라 부른다. 말은 생각보다 불완전한 수단이다.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만 상대가 느낀 감정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간극은 때로 오해를 낳고 오해는 침묵과 거리감을 불러온다. 인간관계에서 진짜 문제는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떻게 전달되었느냐'이다.


관계가 힘든 이유는 갈등이 아니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고 서로의 상처가 다른 것이다. 말은 단지 외피일 뿐 진심은 말의 바깥에서 흐르고 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말한다. 우리는 '관계 자본' 안에서 살아간다고. 친구, 연인, 가족마저도 때때로 무의식적 경쟁과 비교의 구도 안에 놓이게 된다.


‘저 사람은 왜 나보다 더 사랑받는가’

‘나는 왜 이만큼밖에 인정받지 못하는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타인의 잣대를 들이민다. 그리고 기준은 언제나 불공평하게 설계되어 있다. 기준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줄이고 상대를 밀어내며 때론 관계를 질투하게 된다. 관계는 사랑으로 시작되지만 구조는 힘의 균형으로 유지된다.


내가 힘든 이유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이 끝없이 시험당하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자주 오해받지만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거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나는 거울 속에서 나의 결핍과 왜곡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침묵은 거절처럼 느껴지고 무시처럼 해석된다. 결국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존재를 완전히 껴안을 수는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고독한 존재이기에 그래서 이토록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상처 입히는 것이다.


신경과학은 관계의 고통을 ‘생존’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누군가의 부정적 반응은 뇌가 실제로 ‘생존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뇌는 사회적 배척을 신체적 통증과 같은 부위에서 처리한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뇌는 몸이 다친 것처럼 반응한다.


즉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뇌는 관계의 불안과 갈등을 생물학적 고통으로 전환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관계는 칼보다 깊게 나를 찌른다.


어떤 관계는 나를 자라게 하고 어떤 관계는 나를 조용히 말라가게 만든다. 차이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과거, 나의 언어, 나의 세계관, 나의 생물학적 반응까지를 포함한 총체적 삶의 이야기이다.


이 관계가 왜 나를 힘들게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자랐고 어떤 말에 약하며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이해하고 나면 때로 관계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더라도 고통의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는 결국 상처로 인해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존재이기에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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