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병들게 하는 말, 행동, 분위기

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1

by 은파랑




나를 병들게 하는 말, 행동, 분위기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말, 어떤 눈빛, 어떤 침묵이 조용히 병들게 했다. 거칠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은 그것들은 오히려 너무도 일상적인 얼굴로 스며들 듯 아프게 했다.


말은 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날이 선 칼보다 무딘 말이다. "그게 문제야." "그렇게밖에 못 해?" "넌 늘 그래." 이 말들은 평가이자 낙인이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정이다.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인지정서행동치료에서 '비합리적 신념'을 경계했다. 그중 하나가 이런 식의 일반화된 판단이다. 반복된 단정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신념은 천천히 마음을 병들게 한다.


언어학자 게오르크 슈타인도 말한다. 말은 의미의 전달 이전에 존재의 인정이다. 누군가 내 말의 끝을 자르고 말을 끊을 때 그건 대화의 중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무시로 다가온다. '듣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메시지로 변한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이를 ‘비언어적 배제(nonverbal exclusion)’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감지한다. 그의 주의가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나에게 있는지. 눈을 피하는 시선, 핸드폰을 바라보는 손, 무심한 대답 하나에도 소외감을 느낀다.


행동도 그러하다. 칭찬이 인색한 사람들, 감사하지 않는 관계, 사소한 배려조차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 사회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자원 고갈(psychological resource depletion)’이라 부른다. 타인을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반복되면서 정작 자신의 감정은 소진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런 관계 속에 살아간다. 주는 것만이 익숙해진 인간관계는 어느 순간 무의식의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 그곳에서 마음은 조금씩 메말라 간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상징폭력’이라는 말을 했다. 폭력은 주먹질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위계와 암묵적 규범 속에서 누군가를 침묵하게 만드는 힘,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기. 이런 분위기는 학교와 회사, 가정과 친구 사이에서 은근히 퍼져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말을 꺼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자리, 분위기를 깬다고 지적받는 순간들. 그래서 조용히 침묵하고 미소 지으며 병든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피곤한 이유는 과도한 성취의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피로 자체가 아니라 피로를 나눌 수 없는 관계다. 말할 수 없는 구조,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하나 없는 분위기,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못하는 세계. 그런 구조 속에 있을 때 인간은 외롭고 외로움은 우리를 병들게 만든다.


과학적으로도 외로움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UCLA의 사회신경과학자 나오미 아이젠버거는 실험을 통해 외로움이 뇌의 통증과 같은 부위를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말하자면 외면당할 때 뇌는 진짜 상처를 입은 것처럼 고통을 느낀다. 그저 혼자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지 않았다는 감각이 물리적으로 아프게 만든다.


어쩌면 병들게 하는 건 말이나 행동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속에 담긴 태도, 맥락,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 가시 없는 말에도 말이 나를 겨누고 있다면 충분히 아플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침묵이 나를 버리고 있는 것 같다면 마음은 멍이 든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공기다. 내가 뿜는 말과 시선, 무심한 손짓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만들고 망가뜨리기도 한다. 말은 마시고 숨 쉬는 공기처럼 언제나 곁에 있다. 그리고 공기의 성분이 독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아파온다.


그래서 오늘도 조심하려 한다. 나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깎지 않기를. 무심한 눈빛이 타인의 하루를 허물지 않기를. 혹시 내가 만든 공기가 누군가에게 독이 되진 않았는지 돌아본다. 우리는 서로의 공기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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