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58
– 기억, 감정 그리고 마음의 지형에 새겨진 흔적들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사라진 사람의 뒷모습
혹은 실패 앞에서 움츠러든 자신을 떠올릴 때
마음 어딘가가 아직 욱신거린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이런 마음의 상처를 정서적 기억(emotional memory)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비슷한 상황이 닿기만 해도 되살아나는 감정의 잔상들이다.
심리학자 조셉 르두(Joseph LeDoux)는
감정의 기억이 뇌의 편도체(amygdala)에 저장된다고 했다.
이 기억은 논리보다 빠르게 작동하며
우리의 반응을 이끈다.
즉, 상처는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연결되어 몸과 마음의 반응 체계 전체에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아물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정도는 잊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먼저 움찔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그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회로 깊은 곳에
감정이 ‘아직 거기 있다’는 신호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특히 더 깊게 남는다.
아이가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충분하지 않을 때
상처는 설명되지 못한 채
몸과 표정, 침묵과 눈빛 속에 눌려 저장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종종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같은
왜곡된 자기 인식으로 이어진다.
존 볼비(John Bowlby)의 애착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나 보호자와의 관계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틀을 형성한다.
그 관계에서 경험한 외면, 비난, 무관심이
내면화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관계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상처는 이렇게 마음의 지형을 바꾸어
사람을 바라보는 눈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까지
깊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상처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처는 나의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고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상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아픔을 기억하면서도
기억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이다.
심리학자 댄 시걸(Dan Siegel)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라고 말한다.
기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을 바꾸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약했던 것이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것뿐이야.’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상처를
부끄러운 흉터가 아닌
나를 이해하는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의 자리를 다르게 살아낼 수는 있다.
그 자리에 새로운 경험을 쌓고
다정한 관계를 심고
내 마음의 언어로 기억을 다시 써 내려갈 때
과거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는 감옥이 아닌
내가 걸어온 길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상처는 마음에 남는다.
하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힘 또한
우리 안에 있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