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231
밤은 길었다.
눈꺼풀은 무겁고도 가볍다. 잠이 와야 할 시간, 깊은 어둠이 고요히 감싸지만 정작 뇌는 쉼 없이 속삭인다. 해야 했던 일, 하지 못한 말,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들.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의 잔물결이 머릿속을 소란스럽게 뒤흔든다. 눈을 감아도 눈앞이 너무 밝고 눈을 떠도 세상은 너무 흐리다. 그렇게 또 새벽을 맞이한다.
끝없는 밤의 연장선에서 찾아오는 것이 있다. ‘무기력’이다. 한숨처럼 찾아와 마음을 눌러앉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책을 펼쳐도 글자가 들어오지 않고 사람을 만나도 표정이 없다. 인형극의 무대 뒤에 숨은 손이 멈춰버린 것처럼 일상이 정지된다. 피곤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의욕이 없는 시기일까? 무기력은 그렇게 가볍게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나를 갉아먹는 질병의 일종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1967년, 강아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배움 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일정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고통을 겪은 생명체는 나중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스스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기력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실패, 거절, 상실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외부 스트레스는 ‘해봤자 안 돼’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뇌는 변화 가능성을 감지하지 못하고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신념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 기분이 아니라 뇌의 신경 회로가 실제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현대 신경과학은 무기력 상태가 편도체(amygdala), 전두엽(prefrontal cortex), 해마(hippocampus) 등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부위에서의 신경 전달 이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면은 뇌와 몸이 회복되는 생리적 의식의 재부팅이다. 수면 중 뇌는 시냅스를 정리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제거하며 면역체계를 재정비한다.
하지만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cortisol)이 과다 분비되거나 멜라토닌 분비 주기가 무너지면 정교한 시스템은 균형을 잃는다. 깊은 수면 단계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자주 깨게 되고 이는 ‘수면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심리학자 윌리엄 데만트는 불면을 "현대인의 조용한 전염병"이라 부르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라 정서적 파괴를 동반하는 심리적 고통의 뿌리라고 말한다.
불면은 낮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무기력은 밤의 불면으로 되돌아오는 고통의 순환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순환의 끝에서 이유 없는 눈물을 마주하게 된다.
“왜 우는지 몰라서 더 슬퍼요.”
이런 말은 실제 우울증 환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울음을 슬픔의 결과라고 여기지만 과학은 그것을 뇌와 호르몬의 복합 작용이라고 말한다.
눈물은 세 종류가 있다. 기초 눈물, 반사 눈물, 감정 눈물. 이 중 감정 눈물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몸 밖으로 스트레스를 배출하기 위한 생리적 반응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눈물은 내 몸이 더 이상 감정을 안에 담아두지 못해 스스로 열어버린 감정의 밸브다. 울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감정조절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연결이 약해지면 뇌는 외부 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감정폭발을 조절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평소 같으면 넘길 작은 일에도 눈물이 터지고 공허함 앞에서도 감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무기력, 불면, 이유 없는 눈물. 이 세 가지는 ‘기분장애(mood disorder)’의 핵심 증상이다. 특히 주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는 슬픈 감정을 넘어서 삶 전체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잃게 만든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질병 부담을 안길 병으로 ‘우울증’을 꼽았다. 그만큼 이 질병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감정의 고통을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곤 한다. “기운 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마음먹기에 달렸어.”
그러나 의학은 단호하다. 이것은 마음이 약해서 생긴 게 아니라 뇌의 생화학적 불균형이 초래한 질환이다. 감기가 그렇듯 우울도 치료받아야 할 병이며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이기에 본질적으로 결핍을 안고 산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요소를 넘어서 존재 자체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무기력은 의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잠시 흐려진 상태일 수 있다. 불면은 수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잃은 밤일 수 있다. 이유 없는 눈물은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슬픔'이 흘러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삶은 반복되는 부조리 속에서도 끝까지 의미를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때로 허무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우리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의미는 때때로 한 줄의 시, 한 사람의 손길,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오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더라도 괜찮다.
밤새 뒤척였고 아침에 이유 없이 울었다 해도 괜찮다.
당신의 뇌는 당신의 몸은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지금도 조용히 싸우고 있다. 설명되지 않는 모든 감정에도 과학적 이유가 있고 심리적 맥락이 있으며 존재의 깊은 층위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것. 언어를 잃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순간 전문가의 손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는 것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다정하기를 바란다.
다정함이 바로 회복의 첫걸음이 될 테니까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