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냥 음악이 좋았고
그 사람의 말이 위로가 되었고
공연 영상 보면서 마음이 뛰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슬며시 지갑이 열렸다.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앨범 하나쯤은 사줘야 할 것 같아서
포토카드가 예뻐서
티셔츠 디자인이 은근 데일리템 같아서
콘서트 생중계 응원봉…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거 하나쯤이야” 하고 산 굿즈가
한 달 후 택배 박스 12개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사는 건, 존재를 실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덕질은 감정 기반 소비다.
이건 단순한 지름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내 감정을 물리적인 형태로 확인하기 위해
물건은 감정의 실물화다.
소장용이자 증명서이자 애정의 조각.
팬사인회 응모… 그건 약간 고급의 수학이다
“한 장 사면 확률 0.02%니까…
50장 사면 1장당 4,500원이니까…
택배비까지 하면…”
계산기 두드리는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복권과 로또 사이 어디쯤에서 헤엄친다.
그리고 떨어진다.
그럼 생각한다.
“진짜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런데도 다시 사게 된다.
그만큼 간절하니까.
돈으로 사랑을 사는 게 아니야.
그냥, 돈으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거야.
가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뭘 바란다고 이렇게까지 하지?”
“결국 돈 쓴 만큼 보이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돈을 쓴 건 감정을 산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커서 나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거야.”
좋아하는 만큼, 내 방식대로 애정을 쏟은 거니까.
돈을 쓰는 만큼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다가가고 싶은 거야.’
사실 팬과 아티스트 사이의 거리는
돈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진심은 리트윗 수나 굿즈 소장 수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만큼은 진짜다.
티켓팅 실패한 날에도,
굿즈가 품절된 날에도,
응모 떨어졌지만 박스 쌓인 날에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을 손에 들고 있었다.
덕질은 금액이 아니라 감정의 총량이다.
가끔은 통장 잔액을 보고 놀라고,
가끔은 나보다 최애가 더 잘 먹는 것 같고,
가끔은 택배 상자 사이에서 이불을 덮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내가 이걸 샀기 때문에 가까워진 게 아니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걸 산 거였다는 걸.
그리고 그 마음은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진심이라는 걸
‘최애 위한 지름’의 심리학
“이건 진짜 마지막이야.”
“이번 컴백까지만.”
“이 굿즈만 사고 안 산다 진짜.”
라고 말한 사람이
다음 날 새벽 2시,
공구 오픈 알림 설정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쉽게 지갑을 여는 걸까?
왜 그 사람을 위해서는
‘카드 긁는 손이 너무 부드러워지는 걸까?’
좋아하는 감정을 ‘물질’로 구체화하려는 심리.
심리학에서는
감정의 구체화 욕구(emotional concret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말로는 부족하니까,
몸으로, 행동으로, 물건으로 표현하고 싶은 심리.
덕질에서의 굿즈, 앨범, 포카, 응원봉…
이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 팬아트를 그리는 사람도,
→ 브이앱을 정리하는 사람도,
→ 47장의 앨범을 사는 사람도
모두 같은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내가 뭔가 해주고 싶어” = 감정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마음
덕질은 때때로 일방적인 관계처럼 느껴진다.
그 사람은 나를 모르고
나는 그 사람을 매일 생각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도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감정의 주도권을 갖고 싶어진다.
내가 스트리밍 한 만큼 차트에 기여됐을 때
내가 참여한 서포트가 인증됐을 때
내 지름이 앨범 초동 수치에 보일 때
그 순간,
비로소 팬이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관계의 ‘참여자’가 된다.
지름은
감정의 일방통행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저항이자 실천이다.
포카, 굿즈, 서포트 = 감정의 상징 자산(symbolic asset)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물건에 ‘감정의 의미’를 투영한다고.
덕질에서의 소비는
‘물건을 산다’기보다는
‘감정을 소유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포카 3장이 아니라,
→ “이 시기의 ○○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했는지”
MD 머그컵이 아니라,
→ “그 사람과 함께하는 루틴의 상징”
스페셜 패키지가 아니라,
→ “나도 이 세계의 일부라는 자격증”
“지름”은 내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감정을 물질로 고정하는 방법이다.
응모, 한정판, 단독 굿즈… = 소속감 + 희소성 + 운명의식
이건 진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희소성 효과(scarcity effect) + 사회적 소속감 + 운명의식이 폭발적으로 작용하는 순간.
“이번에 이 포카 못 가지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
“지금 아니면 안 나와, 진짜 못 구해”
“이건 내가 가져야 할 운명이야…”
→ 희소성은 뇌에 도파민을 뿜게 한다.
→ 랜덤은 운명 서사를 만든다.
→ 성공하면 “내가 선택받았다”는 착각이 생긴다.
이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감정 + 확률 + 서사'가 결합된
완벽한 감정 도박판이다.
‘지름’은 사랑의 언어 중 하나다
덕질 소비를 비웃는 사람도 있다.
“걔가 너 누군지도 몰라.”
“그거 사서 뭐 하게?”
“돈 아깝게 왜 그래?”
하지만 덕후는 안다.
이건 아깝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어떤 존재인지를
내가 나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라는 걸.
지름은 감정의 표현이고,
소비는 나만의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로
나는 지금 이 감정을
살아 있는 감정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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