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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Feb 26. 2020

광활한 우주 속 먼지 한 톨이 된 기분입니다.

매일 말도 안 되게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의 부작용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이 황홀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실감도 나지 않았고. 이것이 정말 현실인가 싶을 정도의 풍경이 펼쳐진 이 곳은 아이슬란드.


눈 덮인 산도 내가 예전에 보아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고, 운전대 앞으로 펼쳐진 광야도 끝이 없다. 



그냥 모든 게 어나더 차원이다 이곳은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디르홀레이(Dyrhólaey)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검푸른 바닷물,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검은색의 고운 모래가 펼쳐진 해변.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생명이 살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오묘한 분위기의 이 곳은 나를 한껏 센치해지게 만들었다. 






때맞춰 하늘도 흐려졌다. 바다에선 더 세차게 파도가 쳤다.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듯 하늘은 회색 구름을, 바다는 거센 파도를 선보였다. 그 둘 사이에 에워싸인 우리는 가만히 그들의 힘자랑을 바라보았다. 


이 광경을 오래 쳐다보니 *게슈탈트 붕괴가 왔다. 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집중할 경우 그 대상의 원래의 형태에 대해 잊어버리는 현상을 말하는 게슈탈트 붕괴는 보통 특정 글자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이 글자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하고 괜히 낯설어 보이는 경우를 예로 많이 든다.


이 광경도 오래 보다 보니 굉장히 낯설었다. 내가 밟고 서있는 이 땅은 지구가 맞나? 저 까만 모래는 모래인가 블랙홀인가? 나는 지금 현실인가 평행세계인가?


(*이 글을 쓰며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실제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반전. 자세한 내용은 여기-나무 위키 페이지- 에서.)





지구의 마지막이 이런 모습일까? 모든 숨 쉬는 것들이 죽어간다면 이런 모습일까? 해리포터가 디멘터에게 숨을 빨릴 때에 이런 느낌일까? 온갖 잡생각이 날아든다. 저 까만 모래를 오래 들여다봐서인지 아득해졌다. 여기에 더 있다간 우울감이라는 것이 폭발할 것 같아 급하게 자리를 옮겼다. 






레이니스피아라(Reynisfiara) 주상절리 해변에 도착했다. 이 곳도 먼저 갔던 디르홀레이처럼 검은 해변으로 유명한데 같은 검은 모래, 굉장히 다른 느낌. 관광객들이 유난히 많아 활기 넘쳐 보이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이 곳의 바다는 조금 더 생기 넘쳐 보였다. 디르홀레이의 바다는 디멘터 같아 보였다면, 레이니스피아라의 바다는 골든 스니치 같아 보였다. (해리포터로 설명하는 진성 해리포터빠) 그러니까 레이니스피아라는 조금 더 활기차고 역동적인 느낌의 바다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바다는 사실 보이는 것보다 파도의 힘이 꽤나 위험해서 몇 미터 이상 접근 금지 등 위험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실제로 관광객들이 객기(?)를 부리다 꼭 한 번씩 사고가 난다고 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파도에 휩쓸리지 말자.







물론 이곳도 말도 안 되는 풍경의 향연이다. 마스나 인터스텔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 우주 소재의 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들이 계속 펼쳐진다. 어제 봤던 풍경과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내일은 더 다른 풍경이 나를 기다린다. 그동안 이곳저곳 많이 여행을 다녀봤지만, 거대한 자연이 나를 휘감고 있다는 것이 매 순간 느껴지는 여행은 생전 처음이었다. 


빌딩과 사람으로 가득 찬 도시 생활만 하다 자연이 말도 안 되게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풍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처음이라, 자연이라는 것이 조금은 무서워졌다. 처음엔 영화 같은 비주얼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갈수록 자연 앞에 인간은 결국 무능력하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이만큼이나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 부작용이 시작됐다.


광활한 자연을 보고,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보며 힐링만 할 줄 알았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걱정 없이 청정 공기를 들이마시고, 트래픽 따위 존재하지 않는 도로를 엽서에 나올법한 풍경들을 마주하고 드라이브하니 처음엔 좋았지. 


끝없이 펼쳐진 눈밭과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조차 안 가는 수평선, 하염없이 펼쳐진 검은 모래, 그리고 푸르다 못해 검푸른 블랙홀 입구같이 생긴 바다. 멋진 풍경이 무서운 풍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 서있는 우리는 하염없이 작아졌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린 정말 한낱 먼지 같은 존재들인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아야 할까?


열심히 사는 것, 좋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도 좋다. 그런데, 누가 알아주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남들 눈치 보면서 산다고 우주에 내 이름 단 행성 하나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 대자연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먼지 덩어리, 저 지구 밖 우주에서 본다면 먼지를 이루는 입자 하나 정도 될까 말까 하다고!






그래서 열심히 살기로 했다. 모순이라고? 단, 내 기준에 맞춰 열심히 살기로 했다. 아등바등하며 겨우겨우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오케이 할 만큼 딱 그만큼만 열심히 살기로. 어차피 먼지인 거 조금 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먼지가 되기로 했다. 내가 실수하거나 길을 잃어도 어차피 아무도 모르니까,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사는 먼지가 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려면 꽤나 많은 능력치가 필요하다. 잡다한 분야에 배경 지식과 기본기가 있어야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려고 할 때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여하튼 그렇게 YOLO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더욱 강화되었다. (합리화+1)


그리고 보람찬 먼지가 되기로 했다. 단순히 직업을 떠나 어떤 일(task)을 하면서 살아야 보람찬 먼지가 될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나는 이 직업을 하면서 살 거야'가 아니라, 살아가며 내가 어떤 미션들을 수행해야 보람찰 수 있을지 생각할 시간을 가질 거다. 그렇게 하나하나 삶의 이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이왕 태어난 거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그 시간들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지 생각하니 갑자기 마구마구 살고 싶어 졌다. 해보고 싶은 것들도 잔뜩 떠오르고.



우주 속 먼지가 되어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삶에 대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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