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타인에 무관심하고 세상에 무심한 편이라 엥간한 일에는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가아끔. 진짜 가아아끔, 내치기 어려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대뇌 변연계* 가 적잖은 타격을 입을 때가 있습니다.
( * 대뇌 변연계: 감정, 행동, 동기 부여, 기억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을 관장하는 대뇌 신경망 시스템 )
아내와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이 정신적 염증이 차츰차츰 느리게 가라앉고 있던 와중, 경주시청년지원사업을 함께 하고 있는 동료 대표님이자 선생님께서 기질과 회복탄력성 그리고 스트레스 검사에 참가할 청년 내담자가 필요하시다는 말씀에 잽싸게 지원했습니다. 올해 6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부터 느끼는 거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어찌 알고 기가 막히게 제게 필요한 손길들이 나타나주는지. 참으로 억세게 운이 좋은 인생인 것 같습니다.
검사는 두 가지 설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 통합스트레스 검사 2) 회복탄력성 검사
1) 통합스트레스 검사 결과에서는 현재 나의 스트레스 수준과 스트레스에 취약한 정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 저의 스트레스 수준과 취약성은 오차 범위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30대 평균값으로 나왔습니다. 검사자님으로부터 이 결과를 직접 들었을 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글을 적고 있는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이 인생 통틀어서 손꼽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황인데, 이 스트레스가 대한민국 30대의 평균값이라니. 한국의 30대 분들이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얼마나 당연하게 보내고 있는지, 새삼 마음이 쓰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만 봐도 대부분이 야근을 밥 먹듯이 당연하게 하고 (회사에게 치이고), 사회에게 치이고 가족에게 치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나를 돌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회사도 사회도 가족들도 모두 다 '쉬엄쉬엄 해',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해'라고 말하며 여유 있게 삶이 흘러가는 반면, 한국에서는 모두가 곧 쓰러질 듯 말 듯 버티며 힘겹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삐끗 쓰러지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기도 하구요. 괜히 OECD 부동의 자살률 1위 국가가 아닙니다.
2) 회복탄력성 검사 결과에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릴 적부터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나에 대해' 관심 있게 공부했던 만큼, 자기 객관화가 썩 잘 되어있었는지, 생각했던 그런 결과를 들었습니다. 다만,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감 능력이 백분위 0, 다시 말해 100명 중 나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0명인 수준이라는 사실은 꽤 신선했습니다. 이 정도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싶어 집에 돌아와 Gemini에게 물어보니 '정서적 공감'능력이 많이 결여된 것이지, 다른 척도 '관계성', '끈기', '낙관성', '자기 효능감', '문제해결력' 등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지적 공감'능력은 뛰어나서 공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더불어 도덕성과 윤리의식 또한 높아서 다행히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Gemini의 말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고기능적 성인이라고 하는데, '고기능적 성인'이라... 무슨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프로그램 같다는 얘기 같아서 재밌습니다. AI가 쓰기에는 적절하게 잘 어울리는 표현 같습니다. 뭐, 고기능적은 잘 모르겠지만, 고기를 매우 좋아하긴 합니다.
검사자님과 거진 한 시간 반 가량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알아갈 수 있었고, 특히 나의 취약점과 부족한 점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나의 못난 점을 스스로 마주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나의 못난 모습을 봐도 어물쩍 넘어가기 십상인데, 이렇게 심리상담을 통해 들여다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무서워서 피할 정도도 아니었고 또 더 나아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깁니다. 밤에 시골집 재래식 화장실에 귀신이 있을까 혼자 가기 무서운데, 든든한 형이 '마 별거 없다!'라고 하며 같이 가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냥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또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잘 알고 함께 해주니, 그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점이나 타로 같은 추측이 아니라 통계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결과로 '나를 정말로 이해한 사람'이기에, 더 마음이 동했습니다. 이번 스트레스의 여정이 오늘의 심리 상담과 지금의 글로써 잘 갈무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들 30대에 접어들고 나면 단단한 '진짜 어른'으로 봐주는 것 같습니다. 질풍노도의 20대를 거쳐 나의 기준과 나의 취향과 나의 능력과 나의 약점을 이해하는 그런 어른. 하지만, 그런 어른이라도 완전히 홀로 모든 걸 떠안을 수 있다는 건, 혹은 완전히 홀로 모든 걸 떠안아야 한다는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결국 사회적 동물이고 잘난 혼자보다 부족한 여럿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요. 30대가 되어서도 혹은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전문가와 함께 조금 더 확실하게 나를 알아가고, 또 혼자서는 불편한 나의 못난 점을 함께 마주한다면.. 이해하고, 위로받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더 행복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