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마, 외국인도 아침이면 모닝똥 싸고 양치해
어렴풋한 기억에 제가 처음 만났던 외국인은 중학교 원어민 선생님입니다.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중학교라고 무슨 좋은 사립학교를 다녔던 건 아니고, 그저 흔한 보통 중학교에 뭐 어쩌다 원어민 선생님이 한두 번 왔었고 그때 처음 외국인이라는 존재를 만났습니다. 그 나이 때 애들이 보통 그렇듯 머릿속이 내 안의 흑염룡과 짝사랑하던 여자애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어 그 때는 외국인에 대해 그렇다 할 별다른 소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언제 한 번 아파트 언덕 아래 다리에서 학원 버스를 기다리다 제게 길을 묻던 키 큰 외국인 남자를 한 번 마주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생경한 기분은 아직 기억이 납니다. 많이 다르고, 낯설고, 그래서 괜히 뭔가 두려워 쫄았었습니다. 어째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나 싶더군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옛날 울산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던 그 외국인 청년은 참 특이한 놈이었습니다.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서울에서도 보기 쉽지 않았던 외국인이 울산 바닥에 있었는지. 뭐, 거기 아파트 가파른 언덕 옆으로 길게 늘어진 개나리가 봄이면 나름 볼만하긴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도 외국인은 내게 몹시 낯선 존재였습니다. 그냥 어디 다른 행성에서 온 이방인 같았습니다. 거기다 당연히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서 죽겠지라는 생각에 외국인에 대해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을 봐도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에 작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1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엄마랑 엄마 친구 이모가 갑자기 선물이라며 나랑 동생 그리고 이모네 남매 이렇게 넷을 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보냈습니다. 아마 당시 딸을 캐나다로 1년간 어학연수를 보내고 온 이모가 엄마한테 애들 외국 경험 한 번 시켜줘야 눈이 트인다면 바람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바람에 아들이 커서 외국 아가씨랑 결혼하고 외국에 정착해 살 줄은 전혀 모르셨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해서 보낸 한 달간의 유럽 여행 동안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외국인도 다 밥 먹고 양치하고 방귀 뀌고 트림하고 아침이면 모닝똥을 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생긴 게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게 생겼어도 어쨌든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점을 가장 크게 느꼈습니다. 이때 깨달은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여러모로 제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외국인이건 내국인이건 유명인이건 소외계층의 사람이건 결국에 우리는 다 그저 한 사람일 뿐이고 너나 나나 사실 그렇게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 못 할 적에 영어로 대화를 하자면 괜히 신경 쓰이고 작아질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이 여기 이 영어 잘하는 친구도 결국 다 똥 싸고 방귀 뀌는 사람이야. 쫄지 말자'라는 마인드로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이게 초반에는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그냥 간덩이가 부어서 어느 상황에 어떤 누구를 만나도 쫄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기 객석에 앉아있는 선생님, 교수님, 친구들, 학부모들, 누구누구 등등 다 집에서는 세수하고 양치하고 방귀 뀌는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쫄지말라고 나를 다독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굳이 스스로를 세뇌하지 않아도 군중 앞에서 얘기하는 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간혹 주위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자존감이 높냐며 물어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어 갓 스물이 되고 유럽 땅을 30일간 누비며 깨달은 진리를 나눠줍니다. '결국 우리는 다 고만고만 비슷한 사람이고 너나 나나 상쾌한 아침 모닝똥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까 쫄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