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열정이 가득하던 대학교 시절에는 대기업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뭔가 멋지고 뭔가 엄청나고 뭔가 어려운 그런 일. 실제로 입사하고 첫 2년은 런던 브릿지에 있는 대기업 본사에서 일한다는 고양감에 솔직히 꽤나 중요하고 엄청난 일을 한다는 생각을 조금 했습니다. 하지만 2년을 넘긴 지금, 회사 일 참 별거 없고 한편으로는 좀 하찮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로벌 회사의 런던 브릿지 본사에 출근해서 내가 하는 일이란, 다른 어떤 사무직과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이메일 쓰기입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무게가 있던, 따지고 보면 일의 대부분은 그냥 수없이 쏟아지는 이메일에 답장을 보내는 일입니다. 필요한 자료 만들고 데이터 분석하고 이것저것 조사한 다음 결국 하는 일은 결국 이메일입니다. 이런 사실에 요즘 좀 회의감이 많이 듭니다.
'이메일', 단어만 들어보면 별 거 없어 보이지만, 이놈의 이메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상당합니다. 이메일의 초창기 정체성은 누군가와 주고받는 마음 따뜻한 편지, 그 편지의 온라인 버전이었을지 모르겠으나, 현대 사회의 회사에서 이메일이 가지는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다양한 사람으로부터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관한 편지들. 거기다 이 편지들은 하나 같이 전부 빠른 회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용 역시 따뜻하고 가벼운 주제가 아니라 심각하고 메마른 주제들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사에서 제 뇌는 수십 갈래로 쪼개집니다. 오른쪽 뒤편 주먹만 한 크기의 뇌의 한 부분은 생산 공정에서 문제가 터진 급한 문제에 관한 이메일을, 왼쪽 앞 작은 부분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보내줘야 할 데이터 분석에 관한 이메일을, 아래쪽 넓게 깔린 부분은 외부 협력사들과 잡힌 수많은 미팅에 관한 이메일들을 다루고 있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야말로 멀티태스킹의 끝판왕입니다. 그러니 하루가 끝나고 나면 뇌가 몹시 지쳐있는 기분이 듭니다. 퇴근 후 저녁에는 실컷 고통받은 뇌를 가만히 쉬게 두고 싶고 그러자니 자기 계발보다는 넷플릭스나 웹툰에 자연스레 손이 갑니다.
다른 사무직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분야, 직위, 전문성을 막론하고 현대사회에 노트북을 쓰는 사무직 혹은 사무 일이 조금이라도 포함된 일이라면 필연 Outlook과 같은 이메일 플랫폼을 쓸 것이고 쏟아지는 이메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적당히' 들어오는 이메일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나, 디지털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업무량이 얼마나 되는지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이메일 하나쯤' 더 얹는 일이 다반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이메일을 보내니 이메일은 늘 '과하게 넘쳐' 들어옵니다. 그렇게 우리 뇌는 쪼개지고 시달리고 지쳐갑니다. 이 같은 가상 세계에서의 문제점 - 물리적 한계가 없을 거라는 잘 못 된 가정 - 과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사무직을 벗어나 물리적 한계가 명확한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합니다. 두 손 두 발로 하는 물리적인 일, 그러면서도 단순 반복 업무가 아닌 전문성이 있는 보람차고 즐거운 일.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퇴직하시고 집 짓는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회사 다니실 적 보다 (사무직이셨습니다) 지금 일에 훨씬 보람을 느끼시고 행복해하십니다. 전기 배선 공사, 배관 작업, 보일러 설치, 외벽 및 지붕 설치까지, 어디 하나 전문적이지 않은 일이 없고 거기다 몸을 쓰는 일이기에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야만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십니다. 다수의 프로젝트를 정신없이 돌보지 않아도 되니 그런 뇌가 쪼개지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우십니다. 이런 아버지를 보면 저도 하나 끝내고 다른 거로 넘어가는, 그래서 각 프로젝트에 정말 몰두할 수 있고 또 끝냄으로써 보람을 느끼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사무직에서 탈출해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또 우리가 가진 계획을 이루기 위해 고정적인 수입, 거기다 적잖은 수입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향후 몇 년간은 지금 하는 분야에 머물며 다른 일을 차근차근 철저히 준비해 방향을 틀어야 하지 싶습니다. 부업으로 다른 일을 해 언젠가 전업으로 바꾸는 걸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이라고 뚝딱뚝딱하는 걸 좋아하니, 20대에 잠깐 취미 삼아하던 자전거 분해 수리나 관심 있는 캠핑카 개조 같은 걸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행히 이메일에 치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는 해도 솔직히 그런 일 - 이메일로 업무를 진행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 - 을 썩 잘하는 편이니까 당분간 사무직에 머무른다고 슬프지는 않습니다. 다만, 언젠가 저도 아버지처럼 이쁜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며 내가 좋아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무엇보다 이메일로부터 자유로운(!), 그날을 꿈꾸며 열심히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