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876 낭만 검객의 사랑과 인생

일본 영화 '황혼의 사무라이'

by eunring

가난과 사랑과 감기는 감출 수 없다고 하죠

그 세 가지 중에서 애달픈 가난과 애틋한 사랑

두 가지를 함께 가진 남자의 고단한 삶과

고달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 '황혼의 사무라이'는

정신줄 놓아버린 병든 노모와

엄마를 여읜 어린 두 딸을 보살피는

한 남자의 소소한 인생 이야기입니다


막부 말기에 시골에 살고 있는

하위 무사 이구치 세이베이는

영주에 대한 충의보다

가족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딸바보 아버지입니다


늙고 병든 어머니의 좋은 아들이고

가야노와 이토 어린 두 딸의 자상한 아버지로

보잘것없는 녹봉에 빚까지 짊어졌으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루하루를 욕심 없이 살아가는

하위 무사 세이베이의 인생 여정이

쓸쓸하지만 아름답습니다


진실은 단순하고

때로 아프지만 힘이 셉니다

진심은 한없이 부드럽고 여리지만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장부 정리를 마치고 일과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황혼의 세이베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동료들이 웃으며 떠들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언제나 가족이 우선이죠


퇴근길에 곱게 핀 진달래도 보고

어릴 적 친하게 지낸

친구의 여동생 토모에 앞에서

빵꾸버선을 부끄러워하기도 하면서

가난하지만 딸들에게 공자를 공부하게 하고

그러나 학문을 익히는 것이 바느질보다

쓸모는 없을 거라며 웃는

낭만 검객입니다


정신줄 놓은 노모에 두 딸에 빚까지 첩첩산중

냄새나는 몸으로 영주님께 대답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얼굴 볼 것 없이 힘센 여자와 재혼을 주선하는

가문의 어르신 큰할아버지의 말에

스스럼없이 거절의 답을 건네는

멋진 사나이입니다


어린 딸들이 커가는 모습이

논밭의 곡식 영그는 것처럼 기쁘다고

재혼이 급하지 않다고 말하고는

나중에 딸들에게 하는 말이 재미나요

'가축을 들이는 것도 아닌데

힘만 세면 된다니'라는 말에

웃음이 피식 납니다


봄에는 딸들과 나물을 캐는 그에게

무사를 모집하는 황성으로 가자고

친구 리누마가 권하지만

사무라이보다 농부가 좋다고 말합니다

야망이 없다고 말하는 친구 리누마의

참하고 예쁜 여동생 토모에는

그의 첫사랑이죠


술주정뱅이 남편에게서 도망 나온

토모에와의 수줍은 로맨스도

구슬처럼 알알이 곱게 엮어갑니다

매일 옷감만 짜는 게 지루해 도망 왔다는

토모에 앞에서 빵꾸난 양말을 옷소매에 감추는

사랑꾼의 수줍은 매력도 보여줍니다


토모에 덕분에 생기와 훈김을 되찾은 집에서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다가

어둑한 밤길 벚꽃잎 흩날리는 배웅길에

수염이 많이 자랐다며 손으로 스치듯

어머 부드러워라~ 토모에가 건네는

정다운 시간들이 다정하고 향기로워요


노란 민들레 곱게 핀 강가에서

토모에의 오빠를 대신해

토모에의 전남편 코다와 결투를 하게 된

세이베이는 목검으로 진검을 이기는

저력을 발휘합니다


톡톡 흐트러지는 빗줄기 속에서

토모에의 감사 편지를 읽는 로맨틱 모드에

세이베이는 달달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집에 들러 청소 세탁 요리를 해주는

토모에의 마음을 눈치챈 오빠 리누마가

재혼 이야기를 꺼내지만 가난을 이유로

세이베이는 사양합니다


전쟁 소문에 리누마는 에도로 가고

세이베이에게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영주의 후계자의 반대파 칼잡이 요고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요고의 머리를 들고 오면

인생이 바뀔 거라는 말에

빈곤한 삶이 부끄럽지 않고

병든 노모와 어린 두 딸을 위해

검을 버린 지 오래되어 못 한다는

세이베이의 대답은 단호하지만

부탁 아닌 명령이라고 추방하겠다는 협박에

하위 무사 세이베이는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모에를 불러 사무라이로 예를 차리는

복장과 머리 치장을 부탁하고 마음을 고백한 그는

이기고 돌아와 청혼하면 받아달라고 하지만

며칠 전 어느 군주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토모에의 안타까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목숨을 건 결투를 하기 위해

비장한 걸음을 내딛는 세이베이 앞에

요고는 술병을 들고 나와

산을 넘어 도망치겠노라고 합니다


심부름꾼이고 소모품에 불과한 신세라며

사무라이 요고의 고달픈 인생사가 이어지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두 사람은

쌀통이 텅 빈 기분까지 나누게 됩니다

아내와 딸을 잃은 늙은 사무라이 요고에게

세이베이는 도망칠 기회를 주려고 하지만

결투 끝에 요고는 죽습니다


칼잡이 요고를 이기고 돌아오자

뜻밖에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첫사랑 토모에가 웃으며 반겨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은 3년


뒤이어 일어난 전쟁에 나갔다가

세이베이는 안타깝게도 총에 맞아 죽고

새엄마 토모에는 에도로 가서

두 딸을 보살피고 출가시킨

아버지 곁에 함께 묻혔다는 마무리가

안쓰럽고도 훈훈합니다


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이고

어릴 적부터 마음을 주고받은 오직 한 사람

토모에가 사랑한 황혼의 낭만 검객은

행운의 사나이임이 분명합니다


사랑은 요란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고

행복이란 소소한 일상의 순간 속에

다정다감한 황혼의 빛처럼 소리 없이

잔잔히 깃드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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