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7 아련한 감성 로맨스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아침 하늘에 머무르는 구름이 참 예뻤어요
늘 보던 하늘 풍경이 구름 덕분에
새삼 정겨워서 사진으로 찍어두었는데
새하얀 구름의 잔잔한 흐름에도
그 나름 이유가 있었군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가
잔디에 누워 중얼거려요
'저 구름을 집에 데려가고 싶다'
안타까운 그 마음을 느껴보라고
구름이 내게로 왔었나 봅니다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밀어주던
유모차가 잔디밭에 구르자 잔디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조제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애처롭습니다
한참 오래 전에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일본어를 익히던 시기가 있었죠
그 시절 본 영화 중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도 있어요
남루하고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울적한 분위기가 마음을 묵직하게 하고
집으로 가져갈 수 없는 구름과도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이 한없이 안쓰럽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먹임을
소리없이 안으로 끌어안으며
빛의 방울처럼 눈부시게 흩어지는
그들의 사랑과 연민과 청춘이 안타까워
씁쓸한 여운이 길고 오래 남았습니다
오래전 본 영화를 다시 보며
기억의 오류를 깨닫습니다
본명은 쿠미코인데
스스로 조제라는 여주인공 조제 역을
우에노 주리라고 잠시 착각했어요
어리고 풋풋한 우에노 주리는
츠네오의 여자친구인 카나에 역이고
조제 역은 이케와키 치즈루가
무심한 듯 애처롭고 단호하면서도
한없이 여린 조제 역할을 제대로 연기했네요
할머니 말처럼 불량품이고
고장이 난 조제의 홀로서기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청춘의 아픔을 싣고
세상을 보여주는 낡은 유모차와
할머니가 주워다 준 온갖 헌 책들과
걸을 수 없는 조제에게 선뜻 등을 내주는
츠네오의 사랑이 함께 합니다
낡아빠진 유모차를 십 년째 끄는
할머니 덕분에 조제는 세상 구경을 하며
꽃과 고양이를 만나고 늘 책을 읽어요
할머니가 주워다 준 책들을
하도 여러 번 읽고 또 읽어
다 외워버렸다는 조제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
내용을 줄줄이 외우죠
'언젠가 당신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모두 똑같아지는 거야'
'한 달 후 일 년 후'의 주인공 이름
조제를 쿠미코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은
사랑이 위태롭고도 약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영리하고 매력적인 여주인공
조제처럼 살고 싶었던 걸까요?
속편을 기다린다는 조제가
책의 제목을 아느냐고 물으며
누군가 읽고 버리기를 기다리는데
안 버린다고 안타까워하죠
서점에서 이미 절판이라는
속편 '신기한 구름'을 헌책방에서 구해다 주자
조제는 금빛 가발을 쓰고 책을 읽다가 웃어요
'아 웃었다' 조제를 보며 웃는
츠네오의 순수함이 눈부십니다
청춘은 그렇게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맑아서
깨어지는 것도 한순간인 것이죠
모든 걸 책으로 배우는
조제가 가진 온갖 종류의 책들 속에는
나중에 츠네오의 후배가 되는
가나이가 쓰고 버린 교과서도 있어요
교과서들 속에 핫한 잡지도 들어있죠
다리가 불편해 걷지 못하지만
꽃이랑 고양이 등 세상을 봐야 해서
위험한 산책을 그만둘 수 없다는
조제를 할머니는 불량품이라고 해요
고장 난 물건은 다시 고칠 수 없다고
츠네오에게 야무지게 선을 그어요
사회복지 공부를 하는
츠네오의 여자친구 카나에(우에노 주리)로 인해
조제도 깊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츠네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되는데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나게 된
후배 가나이 하루키를
단지 가나이 하루키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한 대 때리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기껏 잊었는데
잊으려고 하는데 왜 생각나게 하느냐'는
츠네오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조제의 집에 있던 주워온 교과서들이
바로 가나이 하루키의 것이었으니까요
교과서의 주인인 후배 가나이를 보며
조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츠네오는
사회복지사로부터 조제의 할머니가
갑작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문득 조제를 찾아간 츠네오에게
조제가 말합니다
'가버려
가라고 해서 정말 갈 거면
어서 가버리란 말이야
가지 마 가지 말고 있어 줘'
그렇게 츠네오는
혼자 남은 조제 곁에 머무르게 되죠
분홍 레이스 모자를 쓰고
두 사람은 함께 호랑이를 보러 갑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을 보러 가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안 생겼더라면
평생 호랑이를 보지 못했을 거'라는
조제의 대사가 유리조각처럼
따끔하게 박힙니다
카나에가 조제를 찾아오고
조제는 이웃집 소녀가 밀어준
유모차를 타고 만나러 갑니다
네가 가진 무기가 부럽다는 카나에의 말에
'그럼 너도 다리를 자르던가'
무심히 던지는 조제의 말이 아파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따귀를 주고받는 동안
유모차를 등진 채 서 있는
이웃집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합니다
일 년 후 동생 다카시를 찾아온
츠네오의 모습이 지쳐 보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카나에를 만난 츠네오는
이미 흔들리는 모습이고
유모차는 고장이 나서
더는 고칠 수 없다는 조제의 말에서 건너오는
두 사람의 이별 예감이 쓸쓸합니다
빌린 차를 타고
두 사람은 츠네오의 본가에 다니러 갑니다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것을 처음 보는
그녀의 첫 여행에는 삶은 달걀과 전병과 귤
그리고 녹차 담긴 보온병이 함께 하죠
가는 길에 수족관에 들렀으나
하필 휴관이라 물고기를 외치며 조제는 울먹이고
휴게소에서 츠네오의 등에 업혀 화장실에 가는
조제에게 츠네오가 휠체어를 사자고 하는데
업어주면 된다는 조제의 말에
츠네오가 자신도 나이 들어가니
좀 봐달라며 웃어요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사랑은 변하고 식어가는 것이니까요
집으로 가기를 망설이는 츠네오에게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며
바다에 가자는 조제를 업고 걷는
츠네오의 등이 버거워 보입니다
조개껍데기가 헤엄을 치는 수족관 같은
물고기의 성 방안에서 조제가 말해요
'처음부터 나는
깊고 깊은 바닷속에 혼자 있었어
나는 거기서 헤엄쳐 올라온 거야
거기는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바람도 비도 없고 다만 고요할 뿐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언젠가 네가 없어지면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몇 달 후
조제가 작별 선물로 건네는
가나이의 잡지를 받아 들고 떠나는
츠네오의 독백은 차분하고 나직합니다
'평온한 이별이었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사실은 단 하나
내가 도망친 것이다'
츠네오는 카나에와 나란히 걸어가다가
점심 먹자는 카나에의 말에
와락 울음을 터트립니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사랑이고 서툰 연민이지만
서로의 홀로서기를 위해 거쳐야 할
사랑의 아픔이고 이별이었으니
츠네오를 이해하고 용서해야겠죠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러 가는
조제의 뒷모습이
무심한 듯 쓸쓸합니다
석쇠에 생선을 굽는 조제는
무심한 듯 평온해 보이고
늘 그렇듯 다이빙이라도 하듯이
의자에서 툭 떨어져 내리는 엔딩이
오래 마음에 남아요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왠지 선뜻 다시 볼 수 없어 미루었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다시 본 것은
오늘 아침 하늘에 머무르던 구름이
유난히 예뻐서였어요
그 구름은 이제 보이지 않아요
조제가 집으로 데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웃어 봅니다
조제는 잘 살아내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