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53 덧없는 사랑
아네모네의 마담
해맑은 아네모네 꽃 사진을
친구님이 보내 주었어요
초록의 시간 속에서 빛나는
수줍은 보랏빛 꽃송이가 곱고
진한 빨강 꽃송이도 매혹적입니다
꽃 향기에 실려 친구님의 향기도
사랑의 인사처럼 날아오는 것만 같아요
'아네모네의 마담'이라는
주요섭의 단편소설이 떠올라요
아네모네 찻집의 마담
주인공 이름이 영숙이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에 빠진
창백한 얼굴의 사각모 청년이
아네모네 찻집에 오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청하곤 해서
재즈를 틀다가도 그 청년을 위해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주는
아네모네의 마담 영숙은
청년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꽃단장을 하고 귀고리도 매만집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청년이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고
이제나 저제나 청년의 고백을 기다리지만
아뿔사~ 착각이었답니다
창백한 얼굴의 청년은
모나리자 닮은 교수 부인을 사랑했으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으로
부인과의 애틋한 추억이 담긴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그리움을 달래고
영숙이 서 있는 카운터 뒤에 걸린
모나리자 그림을 바라보느라
영숙을 바라보았던 것이죠
청년의 친구가 여차저차
그간의 사정을 영숙에게 알려줍니다
그 친구는 애인을 모나리자라고 불렀고
아네모네 찻집에서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랬는데
병으로 입원해 있던 그 부인이
그만 세상을 떠났다는 거죠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네모네 찻집에서는
'미완성 교향곡' 대신 재즈가 흘러나오고
청년을 기다리며 귀고리를 매만지던 영숙은
더 이상 자줏빛 귀고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웃픈 사랑 이야기인데요
귀고리 어쨌냐는 손님의 물음에
아무 대답 없이 빙그레 웃는
아네모네의 마담 영숙의 미소처럼
구슬프고 고적한 사랑입니다
사각모 청년의 이루지 못한 사랑
영숙의 허무한 사랑처럼
아네모네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이래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죽으며 흘린 피에서 피어난 꽃이라는데
아네모네는 바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nemos에서 왔다니까
바람의 꽃인 거죠
친구님의 아네모네 사진을 보며
학생 시절 읽었던
'아네모네의 마담'도 되살려보고
아네모네의 전설도 생각해봅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사랑도 인생도 미완성이지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2악장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듯이
이루지 못한 덧없는 사랑이라도
세상의 모든 사랑은 결코 헛되거나
미완성이 아닌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덧없는 사랑을 간직한 아네모네가
이토록 곱고 아름답듯이
덧없는 사랑도 아름다운 거죠
사랑은 사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