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59 보랏빛 멋진 선물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by eunring

어느새 계절이 빙그르르

온전히 한 바퀴를 돌았나 봅니다

지난해 여름 아파트 현관 앞에서

아침마다 수줍게 나를 반기던

수국 화분들이 다시 돌아왔어요


수국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건

비의 계절이 다가왔다는 의미죠

비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봄날의 빗줄기는 유난히

우리 곁에서 자주 머뭇거렸어요


커피 한 잔 사러 가던 발걸음 멈추고

수국과 눈 맞추고 사진도 찍으며

향기의 깊이가 제각기 다른

수국의 보랏빛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수국이 건네는 소곤거림에도

가만 귀를 기울입니다


수국의 보랏빛과 인사 나누고 돌아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아름다운 보랏빛 영화를 봅니다

오늘의 멋진 선물이 보랏빛인 거죠


사람의 내면에도 풍경이 있다면

나의 내면 풍경은 해변일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보랏빛 옷이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이야기꾼입니다


사진가 영화감독 비주얼 아티스트로

세 번의 삶을 살았다는

아녜스 비르다 감독의 멋진 선물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장면 장면이 아름답고 깊이가 있는데요


소중한 고양이 구구의 무덤 장면이 뭉클해요

나무에 커다란 붉은 꽃 표식을 해두고

헬리콥터로 촬영했답니다

구구의 무덤 너머 공간까지 보여주며

그녀가 깨달은 것은 구구도 인간처럼

하나의 작은 점이라는 말에

문득 마음이 술렁댑니다


머리에 커다란 꽃을 단 아이들이

오두막 안에서 구구의 무덤 영상을 보며

구구와 인사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요


무덤에서는 슬퍼해야 하는데

여기선 알록달록 즐겁다는

파랑 옷 소년도 기특하고

혼자 와야 더 잘 느껴진다며

혼자 보는 소녀도 대견합니다


'해변도 그렇다'라고

아녜스 감독이 감독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도 아름다워요

혼자 봐야 두 배로 느껴진다는 아녜스 감독은

'우리는 생각하고 잊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라고 말하죠


사람이 핵심이고

사람과의 만남을 영화로 찍는다는

아녜스 감독은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영감 창작 공유죠

영감이란 왜 영화를 만들까?

창작이란 어떻게 만들까?

그리고 공유란 영화가 나만의 것이 아닌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이랍니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 영화계에 일어난 운동이래요

기존의 영화 작법에서 벗어나

즉흥 연출과 장면의 비약적 전개와

대담한 묘사 등이 특징이랍니다


'제 영화 안에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리와 시골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죠

여러분이 뭔가를 찍을 때

그게 장소든 풍경이든 사람들이든

여러분이 무얼 생각하고

무얼 꿈꾸고 무얼 하고 싶은지는

여러분이 찍은 게 알려주는 것처럼'


사람과 삶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유작을 남기고

2019년 91세로 하늘의 별이 된

아녜스 감독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하며

건네받은 오늘의 멋진 선물은

보랏빛입니다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프랑스 가수

클레오(코린 마르상)의 번뇌를

거의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라는 영화도

오래전 보았는데 나중에 다시 챙겨봐야겠어요

가물가물 기억 속 그 영화는 아마도

무채색 선물이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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