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65 싱그러운 초여름빛
영화 '톰보이'
프랑스 영화이니 귀가 즐겁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연출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이니
잔잔한 흐름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진심 어린 시선에 담긴
장면과 표정이 사려 깊고 섬세하죠
소년소녀의 풋풋한 감성이 예쁘고
어리디어린 고민과 혼란과 갈등과 비밀과
눈빛의 흔들림까지도 사랑스러워서
초여름의 신록처럼 싱그럽습니다
오빠가 있어서 좋다는
잔(말론 레바나)의 표정이 예뻐요
'난 오빠가 있는데 언니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오빠가 왜 좋은가 묻자
'나를 보호해 주거든
나를 괴롭히는 애들이 있으면 때려주거든'
언니의 비밀을 이해하고 지켜주고
응원하는 잔의 대답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요
밖에서는 든든한 오빠지만
집에서는 상냥하고 예쁜 언니라는 걸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줄 아는
속 깊은 동생입니다
언니 로레가 잔의 손목에
시계를 그려주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여섯 시쯤 돌아온다며 잔을 안아주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로레도 예쁜 언니죠
잔의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주며
소독약 하트를 그려주는 감성 소녀입니다
엄마(소피 카타니)는 말해요
'남자 애인 척하는 거
엄만 괜찮아 하지만 더는 안돼
엄마가 어떡해야 좋을지
가르쳐 줄래?'
응석을 부리듯 엄지손가락을 무는
로레를 야단치는 대신
아빠(마티유 데미)는 말하죠
'내가 어렸을 때도 엄지손가락을 물었어
근데 더 커서도 하면 이상한 거야'
소년 미카엘이 되어 뛰노는
열 살 소녀 로레(조 허란)는
분홍색보다 파란색을 좋아하고
치마보다 바지를 더 좋아하고
축구도 씩씩하게 잘한답니다
짧은 머리가 기막히게 잘 어울려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 로레는
처음 만난 리사(진 디슨)가 이름을 묻자
미카엘이라고 대답하고
소년미를 뽐내며
집에서는 딸이며 언니인 로레
집 밖에 나가서는 소년 미카엘이 되어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뛰놀고
리사의 남자 친구처럼 지냅니다
빨강 원피스 수영복을 싹둑 잘라
삼각 수영복을 만들어 입고
친구들과 신나게 물싸움을 하는 미카엘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즐겁습니다
여동생 잔이
미카엘을 모델 삼아 그리는
그림도 사랑스러워요
푸른 잿빛 눈동자를 갈색으로 칠하고
주근깨도 그려 넣습니다
이마의 주근깨도 톡톡 그리고
뺨의 주근깨도 꼼꼼하게 그려 넣어요
집에서는 언니라 부르고
밖에 나가서는 오빠라고 부르며
언니 로레의 비밀을 지켜주는
기특한 동생이죠
그러나 깜찍한 비밀은 오래가지 않아요
로레가 때려눕힌 친구의 엄마가 찾아와
로레의 미카엘 놀이는 들통이 납니다
레이스 달린 파랑 티셔츠를 입고
엄마와 함께 때린 친구 집에 가서 사과하고
여자 친구 리사네 집까지 가게 되죠
미카엘 아닌 로레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리사와
숲으로 마구 달려가는 미카엘을
뒤따라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파랑 레이스 티셔츠를 벗어 나무에 걸치고
터벅터벅 숲길을 걷는 미카엘은
친구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미카엘이 사실은 치마 입은 여자라고 말하는
소년들 사이에 둘러싸인
로레의 표정이 난감하고
마주 선 리사의 눈빛에 화가 가득합니다
쭈그려 앉은 로레가 안타깝지만
성장을 위한 과정이라면
아픔을 건너뛸 순 없죠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니까요
개학을 앞두고 집콕하는 로레는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창밖을 내다봅니다
초록나무 아래 리사가 서 있어요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남자처럼 보이고
남자아이들처럼 웃옷을 벗고 놀고 싶었던
로레에게 리사가 물어요
'너 이름이 뭐니?'
미카엘이고 싶었던 로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로레야'
쌉싸름한 엔딩이 긴 여운을 남겨요
초여름의 싱그러움 속에
붉은 열매의 떫은맛을 숨기고
잔잔함 속에 풋풋한 혼란을 품고 있는
영화 '톰보이'를 보는 동안
학생 시절 우리 반 친구들이 모두 좋아했던
친구가 문득 생각났어요
갈래 머리를 땋아 내린
우리와 똑같은 소녀였는데
체육시간에 운동을 할 때는
소년미 뿜뿜이라
친구들의 환호를 받곤 했었죠
그런 마음도 있었다고
지금 웃으며 추억하는 어린 시절이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듯이 로레에게도
흔들리고 아픔도 겪으며 지나야 하는
시간들이 있는 것이죠
소년 미카엘의 옷을 벗고
로레의 이름을 되찾은 소녀에게
내 비밀도 살짝 속삭이고 싶어요
'나도 그래
분홍보다 파랑이 좋고
긴 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좋고
치마나 원피스보다 바지가 더 좋아'
진정한 나다움을 찾아가는 로레가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했던 열 살 여름을
아름답게 추억하기를 바라며 내다본
창밖은 어느새 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