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167 비요일의 사랑

일본 영화 '가을의 마티네'

by eunring

빗물 머금은 여름 하늘을 이고

초록초록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을의 마티네'를 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고 한

약속의 시간에 만나지 못하고 안타까울 때

얼룩지듯이 비가 쏟아집니다

그들의 사랑은 비요일의 사랑인 거죠


계절과 상관없이

흐린 비요일에 보기 좋은

영화 '가을의 마티네'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차분함이 좋고

이시다 유리코의 연기도 우아하고

배경인 듯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 기타 선율이 아름다워요


한순간에 어긋나 버린

안타까운 사랑을 타고 흐르는

두 주인공 사토시(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요코(이시다 유리코)의 흔들리는 감정까지도

클래식 기타의 선율처럼 우아하고 섬세합니다

그들의 사랑은 철부지 풋사랑이 아니니까요


마티네는 낮에 펼쳐지는 공연이라

저녁 공연과는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주는데

'가을의 마티네'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가 원작이랍니다

낮 공연의 끝이니 어스름 저녁 무렵이 될 테고

감성 충만한 시간이니 가을과도 어울리고

삶의 우여곡절을 겪은 두 사람이

다시 시작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괜찮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가 항상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미래 역시 과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라는

사토시의 말이 클래식 기타의 선율처럼

잔잔히 귀에 들어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4년을 보낸 후 사토시는

스승의 추모앨범에 참여하고

콘서트도 기획하는데 도쿄에 첫눈이 내립니다

요코가 결혼 후 뉴욕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사토시의 표정이 우울하고

4년 만에 다시 기타를 손에 드는 사토시는

'행복의 동전' 주제곡을 연주하는데

손이 쉽지 않아요


남편 리처드와 불화를 겪으며 지내는

뉴욕의 요코는 아들 켄에게

행복의 동전이 있다면 무얼 사고 싶은지 물어요

커다란 공룡이라고 대답하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요코는 이혼을 진행합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 행복의 동전은

요코의 아버지가 만든 영화의 주제가이고

사토시가 기타 연주를 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죠

행복의 동전은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껏 본 적 없으나

영원히 쓸 수 있는 행복의 동전을 꺼내

일제히 던져주리라

다시금 고요해진 양탄자 위에 서서

마침내 진정한 미소를 짓는

그 연인들을 향해'


추모 앨범 재킷 사진을 찍는 사토시는

슬퍼 보여요 수염을 깎아도 마찬가지죠

앨범에 들어갈 사토시의 인사말은

'예전에 어느 특별한 밤에'로 시작합니다


사토시의 매니저였고

지금은 유키의 엄마이고

사토시의 아내가 된 사나에는

사토시가 스무 살 첫 공연을 했던

뉴욕의 공연장을 찾아갑니다


매니저일 때부터 사토시를 위한

명조연이 되고 싶었다는 사나에는

요코를 찾아와 사토시의 새 앨범을 건네고

11월 뉴욕 공연에 초대하며

4년 전 두 사람 사이에서 거짓말로

걸림돌을 놓은 일을 눈물로 사과합니다


자신의 인생 목표는

거짓이 아니라 사토시라며

어긋남의 이별 문자를 보낸 사실을

고백하는 사나에에게 요코가 물어요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요?'


비로소 진실을 드러내며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나에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그 행복을 지키라고 유코는 말하죠


유리컵을 손으로 으깨는

사토시의 눈물이 빗물이고

흐르는 기타 선율까지도 아픔의 빗물입니다

진실을 알고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우는

요코의 눈물 역시 빗물이죠


뉴욕 공연을 앞두고 용담화에 물을 주는

사토시와 딸 유키에게 다가와

베토벤의 일기를 읽었다는

사나에의 미소가 슬퍼요

뉴욕 공연을 떠나는 사토시를 배웅하며

유키를 데리고 본가에 가있을 테니

걱정 말고 맘껏 하고 오라는 사나에의

한숨이 소리도 없이 깊숙합니다


사토시의 앨범을 듣는 요코는

앨범에 적힌 사토시의 인사말을 읽어요

'예전에 어느 특별 밤에

소중한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건 미래라지만

과거도 바꿀 수 있다며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만남으로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사토시의 진심을 읽고

요코는 사토시의 공연장으로 달려갑니다


'지난 4년간 연주할 수 없었고

그 힘든 시간이 오늘을 선물했다'고

사토시는 말을 이어요

콘서트 후 센트럴파크 호수를 걸을 거라며

소중한 친구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마티네 공연의 마지막으로

아주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다고

사토시가 덧붙입니다

'행복의 동전을 당신을 위해'


공연장 이층 자리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요코가 앉아 있고

'행복의 동전'을 들으며 웃는 요코의 눈빛에

빗물 같은 슬픔이 어려 있어요


새들이 날아다니는 센트럴파크 호숫가에서

마침내 마주하는 두 사람의

복잡 미묘한 표정에 담긴 비요일의 사랑이

클래식 기타의 선율과 함께

잔잔히 아름답습니다


영화 속 '행복의 동전'은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연주랍니다

도쿄 파리 뉴욕 어디에 있어도

서로를 생각하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마티네의 끝에서' 시작되는

두 사람의 사랑에

빗물 대신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포근하게 머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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