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15 인생의 미로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동화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잔혹동화랍니다
판타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다크 판타지랍니다
미로는 그다지 반갑지 않으나
오필리아라는 이름은 반갑고
세 개의 열쇠는 흥미롭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자장가처럼 듣다가 스르르 꿈나라로 빠져들던
재미난 전래 동화 속에서도
세 개의 주머니가 나오곤 했죠
위험이 닥치면 하나씩 열어보며
위기를 모면하는 이야기가 신기했어요
동화라기에는 가슴 먹먹 슬프고
판타지라기에는 기묘하게 어둡지만
사랑스러운 소녀 오필리아의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에 끌려
'판의 미로'를 봅니다
오필리아가 벗어나고 싶었던
현실의 잔인함과 비정함에
잠시 눈을 감아보기도 하면서
머뭇머뭇 '판의 미로'를 따라가 봅니다
어른들을 위한 잔혹 동화가 맞군요
잠시 눈을 감는다고 해서 피해지지 않는
어둡고 절박한 현실이 배경이지만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해요
1944년 스페인이랍니다
내전은 끝났으나 독재 정부에 맞선
시민 저항군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죠
소녀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는
만삭인 엄마 카르멘(아리아드나 길)과 함께
새아빠 비달 대위(세르지 로페즈)의
숲 속 기지로 가게 됩니다
시곗바늘처럼 엄격하고 냉정한
새아빠에게 시달리며 지내던 오필리아는
요정을 따라 숲 속의 신비스러운 미로로 들어가
기괴한 모습의 판(더그 존스)을 만나게 됩니다
'산이고 숲이고 땅'이라는 판이 말하기를 오필리아가 지하 세계의 공주 모안나이고
보름달이 떠오르기 전까지
마법의 열쇠 세 개를 손에 넣으면
왕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건데요
오필리아는 밤마다 마법의 열쇠를
손에 쥐기 위한 모험을 하게 됩니다
오필리아가 눈알 괴물의 식탁에 놓여 있는
보랏빛 포도를 먹으려고 하자
요정들이 오필리아에게 먹지 말라고
손사래 치는 장면이 있어요
오필리아가 포도를 먹는 행동을
용기 있는 불복종을 보여주는 거라고
기예르모 감독은 말했답니다
공주가 되기 위한 미덕이
바로 용기라는 거죠
시민 저항군의 첩자이던
가정부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가
정체가 탄로 나 숲 속 기지를 떠나려 할 때
어두운 빗속에서 오필리아가 따라나서지만
비달 대위에게 붙잡히게 된 메르세데스는
다행히 달아나 저항군의 도움을 받고
오필리아에게는 판이 나타납니다
공주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기회라고
꼬치꼬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아기 남동생을 데리고 미로로 가라며
잠긴 문은 하얀 분필로 그려 만들면 된다고 하죠
응애응애 우는 아기 남동생을 안고
새아빠 비달을 피해 몰래 달아나다가
숲 속의 미로에서 비달에게 쫓기는 긴박감이
오필리아의 숨소리에서 그대로 느껴집니다
지하 왕국으로 가서 공주가 되려면
아기의 피 한 방울 필요하다는 판의 말에
공주가 되는 것도 싫고
내 동생이 더 소중하다는 오필리아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안고 가며 비달은
총으로 오필리아를 쏘고 말아요
비정한 새아빠의 총에 맞아
오필리아는 쓰러집니다
비달 역시 시민 저항군의 무리와
메르세데스에게 붙잡힙니다
'내 아들을 부탁해'
시계를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아버지의 죽은 시간을
아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지만
아기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랄 거라는
메르세데스의 대답이 냉정합니다
동굴 안에 쓰러져 누운 오필리아 손끝에
슬프도록 선명하게 붉은
핏빛을 어루만지듯 보름달이 떠오르고
메르세데스의 구슬픈 자장가를 들으며
오필리아는 공주가 되어
지하 세계로 떠납니다
아기 동생 대신 오필리아가 흘린 피가
지하 세계의 문을 여는 마지막 임무였던 것이죠
눈부신 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지하 궁전에서 오필리아는
공주로서 환영과 축하를 받습니다
"지혜롭게 해내셨군요'
판의 축하가 공허하게 들리는 건
오필리아를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환상 속에서 웃으며 눈감는
사랑스러운 소녀 오필리아를
지하 세계로 보내야 하는 결말이
가슴 먹먹합니다
지하 궁전의 모안나 공주보다는
숲 속의 행복한 소녀 오필리아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메르세데스의 눈물에 젖어들어요
'인간과 잠시 머물다 간 공주
공주가 다녀간 후 나무가 살아나고
꽃이 피어났으니 이 또한 기쁨'이라는
엔딩 멘트가 안타깝고 쓸쓸하기만 합니다
인생의 미로를 헤매다가
막다른 길목에서 굳게 닫힌 문을 만났을 때
오필리아처럼 하얀 분필로 네모를 그리면
네모난 문이 뚝딱 만들어지고
그 문이 스르르 활짝 열리면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사랑스러운 소녀 오필리아처럼
아프고 답답한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희망의 창문을 만들 수 있는
용기라는 이름의 하얀 분필 하나씩
주머니에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