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16 아낌없이 주는 눈물
영화 '행복한 라짜로'
비에 젖은
수국 사진을 찍어봅니다
보랏빛 꽃잎에도 빗줄기 톡톡
초록 잎사귀에도 빗방울 송알송알
선한 사람 라짜로의 눈물처럼
또르르 투명하게 맺혀 있어요
머리만 빗어도 왕자님 같은 선한 사람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를 만난 아침
1부와 2부 사이 잠시 쉬는 시간
오늘의 커피 한 잔 사러가는 길에
선한 사람 라짜로의 눈물방울 같은
수국의 눈물을 사진에 담아 봅니다
라자로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라짜로라고 부른답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포스터에는
당신이라서 '행복한 라짜로'라는 제목과
큼직한 초록 담배나뭇잎에 반쯤 가려진
라짜로의 해맑고 선한 눈망울이 보입니다
웃고 있는 듯한 라짜로의 얼굴이
슬퍼 보여서 행복한 라짜로가 아닌
애잔한 라짜로라고 부르고 싶어요
행복과 슬픔의 그 어디쯤
애잔함이 함께 할 테니까요
아름다운 시골마을 안비올라타에서
맑고 순박한 청년 라짜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명 높은 데 루나 후작부인의 담배농장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합니다
누구나 필요할 때만 라짜로를 부르죠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라짜로에게
너도나도 서슴없이 이런저런 부탁을 건네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이용할 뿐입니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가
엄마 후작부인에게
마을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대해 묻자
후작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착취하고
저들은 라짜르를 착취하는 거야
아마 라짜로 또한 누군가를 이용하겠지'
그러나 선한 사람 라짜로보다
더 바닥인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라짜로의 순박함과 선함은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이용당하고
라짜로는 말없이 이용당합니다
아낌없는 나무처럼 자신을 내주는 거죠
요양을 하기 위해
담배농장의 저택에 머무르게 된
데 루나 후작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자유를 갈망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라짜로와 우정을 쌓아가지만
배다른 형제 같은 친구라고 부르듯
계급이 다름을 인정하는
쓰디쓴 우정인 셈입니다
탄크레디는 납치 자작극을 꾸며
마을에서 떠나 자유를 얻으려 하고
라짜로가 탄크레디의 계획을 돕게 되는데
가짜 납치 소동으로 인해
담배농장의 가혹한 진실이 밝혀지고
마을 사람들은 갇힌 삶에서 벗어나
도시로 이주하게 되지만
라짜로는 혼자 남게 됩니다
형제 같은 친구라면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탄크레디의 이기적인 말에 귀 기울이며
밖에서 비를 맞다가 열병에 걸린 라짜로는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는데요
배가 고파 가축을 훔친 늑대를
찾으러 간 성자가 지쳐 쓰러지고
늑대가 성자를 발견하지만
그에게서 선한 사람의 냄새를 맡고는
그를 놓아준다는 늑대와 성인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이어집니다
라짜로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부활하고
꼬맹이 피포가 청년으로 자랄 만큼의
세월이 지나 만난 안토니아(알바 로르와처)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선한 사람 라짜로를 알아보고
성인을 만나기라도 한 듯
라짜로 앞에 덥석 무릎을 꿇으며
'다들 무릎 꿇어'라고 하죠
라짜로가 스스로 무릎을 꿇는 모습이
안쓰럽고 애잔합니다
예전 마을 사람들은
절벽에서 떨어진 라짜로가
나이가 들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으로 나타나자
악마라고 부르거나 유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라짜로의 선한 눈망울과
천진난만한 얼굴을 이용해서 돈을 벌다가
라짜로의 선함이 마음에 걸리고
차츰 불편해집니다
안토니아는 라자로가 더는 쓸모없다며
돈벌이에 데려가지 않아요
하지만 라짜로는 잡초 속에서
귀한 나물들을 찾아내는 등 여전히
안토니아 가족들의 부림을 당하지만
함께 식탁에 앉지는 못하고
뒤에 물러나 앉아 있어요
나이가 든 탄크레디(토마소 라그노)를
우연히 만나게 된 라짜로와 안토니아 가족은
탄크레디에게 점심 초대를 받아요
초대를 받았으니 복장 최대한 단정히 여미고
최고급 케이크 가게에서 올망졸망 디저트를
가진 돈 50유로만큼만 사들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낡고 초라한
데 루나 후작부인의 아파트를 찾아갑니다
초대한 적 없다는
탄크레디의 부인 테레사의 말에
생전 처음 초대였는데 기억을 못 하다니~
안토니아 가족들이 투덜거리며 돌아서는데
잠시 기다리라고 하던 테레사가
작은 부탁이라는 것을 건넵니다
몹시 비참한 생활이라며
들고 온 디저트를 주고 가라는 부탁에
어쩌다 이 지경이냐고 묻자
은행이 전재산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거죠
고물 트럭은 시동이 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는 라짜로와 함께
안토니아 가족들은 성가가 울려 나오는
근처 성당으로 음악을 들으러 갑니다
비공개 행사라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피아니스트의 선물이 그들을 따라옵니다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대신
성당 밖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이
그들만을 위한 따사로운 선물인 거죠
음악이 떠나간다며 문을 닫지만
음악도 선한 사람 라짜로를 알아봅니다
트럭을 밀고 가다가 잠시 쉬면서 귀 기울여
음악을 듣는 모습이 애틋하고 뭉클합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음악을 들으며
안비올리타 텅 빈 옛 동네 옛집으로 돌아가자는
안토니아 가족의 얘기에서 점점 멀어지며
라짜로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요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선한 사람 라짜로의 눈물이
영화가 건네는 생각의 선물입니다
라짜로는 친구 탄크레디를 위해
재산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러 은행에 갔다가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맞아
경찰들이 오기도 전에 눈을 감습니다
그는 말로 부탁을 했을 뿐
총이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대답했을 뿐이고
뒷주머니에 어릴 적 탄크레디와 놀던
새총이 들어있었을 뿐인데요
총알도 없는 새총이
보안검색대에서 걸린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엔딩 장면에서
죽어가는 라짜로의 눈에만 보이는
늑대가 은행에 나타나 라짜로가 눈을 감자
은행 밖으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선한 사람 라짜로의 영혼이
늑대를 따라나서며
비로소 자유로워진 모습입니다
라짜로의 선한 눈빛이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비를 비웃으면서
신의 은총을 바랄 수 있을까'
영화가 건네는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며
주변을 돌아봅니다
내 주변에도 선한 사람 라짜로 닮은 누군가가
선한 눈망울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죠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선한 마음을 오해하고
꽃 같은 진심을 알아보지 못한 채
무심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톡톡 빗줄기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