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70 저녁에 보자는 말

영화 '무협'

by eunring

바이러스 소동을 견디며

폭염까지 끌어안고

2주 단위로 살다 보니

기억 속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중2병이 새삼 도지는 것 같아요


질풍노도의 시절을

무사히 견딜 수 있었던 건

교과서나 참고서보다 더 애정하던

무협소설 덕분이었죠

천 리 길도 축지법으로 단걸음에 슝~

장풍으로 날려대는 통쾌함에 기대며

독은 독으로 치유한다는 말까지도

신기한 무한 매력 뿜뿜~

그렇게 대책 없는 중2병을

무협지로 달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채널을 돌리다가 '무협'이라는

영화 제목을 만나자마자

마음속에서 불쑥 고개 내미는

중2병을 다독이고 싶은 마음에

채널 고정~


무협(武俠)은

무술이 뛰어난 협객을 의미하고

협객(俠客)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졌답니다


뛰어난 무술에 의협심까지 갖춘

'무협'이라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금성무와 견자단과 탕웨이

주연배우 3 총사가 매력적입니다


청나라 말이 배경입니다

동그란 안경에 중절모를 쓴

수사관 금성무의 부드러우면서도

우수 어린 진지한 분위기와

거친 듯 투박하면서도

웃을 듯 말 듯 귀염 터지는 견자단의

거침없이 화려한 액션은 물론이고

탕웨이의 순수하면서도 야무진 예쁨과

'첨밀밀'을 연출한 진가신 감독의

감각적 스타일과 미스터리한 전개까지

섬세하고 깊이 있고 독특하며 흥미롭습니다


법과 증거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정의로운 수사관 쉬바이지우(금성무)의 분위기 묵직해요

'나를 버리고 리우진시가 되었다'는

리우진시(견자단)는 진심으로

과거를 지우고 새 사람이 되고 싶다는데

사건을 추리하며 바이지우는

진시의 뒤를 엄근진 표정으로 쫓으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남편 진시가 떠날까 두려운 아위(탕웨이)는

진시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잠이 들곤 하는데

'저녁에 봐요'라는 인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전 남편이 저녁에 보자고 집을 나서더니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아들은 남겨두는 대신

베개까지 챙겨 들고 달아난 거죠


강가에서 우연히 진시를 만난 아위는

진시의 과거를 묻지 않아요

아위의 남편이 되어

두 아들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는 진시는

전당포에서 만난 강도와 싸워 무찌르고

마을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 되지만

사건 수사를 맡은 바이지우가

진시의 과거를 캐기 시작하면서

평온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진시는

72파의 부두목이었던 거죠

72파는 탕구트족의 생존자들로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데

교주의 아들이며 이인자인 탕롱이

바로 진시로 신분 세탁을 한 거죠


무공을 지닌 고수 탕롱이 아닌

평범한 진시로 살고 싶었으나

수사관 바이지우가 나타나

그의 정체를 흔들어대기 시작합니다


진시의 정체를 알고 도성으로 향하는

바이지우는 폭우 속에서 진시를 만나는데요

빗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의미심장하죠

사건이 종결되어 도성에 가느냐고 거듭 묻고는

도성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주는

진시가 바이지우와 작벌을 나누는 장면이

울적한 긴장감을 줍니다


진시는 바이저우를 믿고

지름길을 알려주며 배웅하는데

바이저우는 진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뒤를 돌아봅니다

물론 진시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진시를 잡으려고 영장을 받으려는데 쉽지 않아 바이저우는 아내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데요

가짜 약을 판 아버지를 봐주지 않은

원칙주의자 남편 바이저우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아픔을 견디는 아내를 보며

법이 인간보다 중요할까 자문하는

진시의 혼란과 갈등이 깊고 묵직합니다


원칙주의자 바이저우가

진시의 과거를 밝혀내는 바람에

72파와 교주인 아버지가 나타나

진시가 탕롱의 이름을 되찾고

조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진시로 살고 싶은 진시는 아버지와

처절한 싸움 한판을 벌이게 되는 거죠


그동안 진시로 살 수 있게 해 주어 고맙다며

더는 진시로 살 수 없다는 진시에게

'그날 강가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어도

이 마을에 남았겠지?' 묻는

아위의 슬픔도 절절해요


그러나 우는 아위에게 손을 내미는

진시와 아위의 아들

샤오티엔의 눈망울이 해맑고 선해서

안타까운 희망의 빛이 느껴집니다


탕롱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바이지우가 진시에게 물어요

'그날 숲에서 살려준 건 왜였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서'

나를 믿었냐고 바이지우가 다시 묻자

진시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합니다

'믿었지 아위가 쉬바이지우는 착한 사람인데

자신은 그걸 모르는 것 같다고 했거든'


아위는 사람의 진심을 볼 줄 알았던 거죠

바이지우는 진시를 진시를 살릴 방법을

스스로 찾고 있었으니까요

의학적 지식도 갖고 있는 바이지우는

진시로 살려면 탕롱은 죽어야 한다고

빈사의 상태로 수사관들을 속이고

더 깊이 죽어 72파를 속이려는

진시 살리기 작전에 돌입합니다


진시의 네 살짜리 아들 샤오티엔을 찾는 교주와

'혼이여 어서 돌아오라'는 72파의 부르짖음 속에서

깨워야 할 시간을 놓치면 안 되는 긴박한 순간

바이지우는 어쩔 수 없이 진시를 깨우고

깨어난 진시가 살인을 일삼던 팔을

72파에 돌려주겠다며 자신의 팔을 자르는

장면이 비정하고 비장합니다


샤오티엔을 품에 안은 교주가

잘린 진시의 팔을 보며 뭐냐 묻자

이제 72파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진시를 보며 교주는

다 모였으니 밥을 먹자고 하죠


'네 아빠는 나를 닮았다 화를 내면 더욱

지금은 아니다 샤오티엔이 날 닮았다'

노래하는 샤오티엔의 입을 막으며

교주가 회상하는 나뭇잎 이야기는

애틋하고 절절합니다


문 앞에 나무가 있었답니다

어린 진시를 두고 외출하면서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돌아올 거라고 했다죠

어느 날 돌아오니 문 앞 나무의 잎들이

모두 떨어져 있어 진시에게 물었더니

나뭇잎이 다 떨어져야 아버지가 돌아오는데

떨어지지 않아 일부러 떨어뜨렸다고 했답니다

교주는 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나무를 베어버리고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죠


문 앞에 나무가 없으니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아들 진시가 안쓰러웠다는 옛이야기에

눈물 그렁한 눈으로 웃으며 우는 교주와 진시

아버지와 아들의 정은 깊지만

두 사람의 길이 서로 다르니

안타깝고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팔을 잘랐으니 우리 관계도 끝이 났다는

진시는 이미 아버지 곁을 떠난 거죠

부자 간의 혈투가 이어지고

'세상이 탕구트족을 버렸는데

넌 다른 가족을 이루다니 배신자라며

하늘은 어찌 아들을 주고 배신하게 만들었냐'고

울부짖던 교주는 번개에 맞아서 죽어요

수사 종결이라고 중얼거리는 바이지우의

동그란 안경에 흐르는 빗물이

주르르 눈물입니다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진시와 아위 그리고 두 아들이

밝은 옷을 입고 밝은 표정으로

행복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아침을 먹고

일하러 나가는 진시를 불러 세우고

아위는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리듯 말해요

'저녁에 봐요 진시'


두고 보자는 말은 왠지 뒤끝 있어 보이지만

저녁에 보자는 말은 다정하고 따스합니다

아위가 좋아하지 않던 인사를

머뭇머뭇 진시에게 건네는 모습이

가슴 찡합니다


그럼요

가족은 저녁에 다시 모여

함께 저녁을 나누는 사람들이니까요

저녁에 봐요~라는 인사를

아무에게나 건네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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