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85 기억의 늪에서 건져 올린 슬픔
영화 '반교:디텐션'
깊은 밤중에는 보다가 포기하고
환한 대낮에 다시 봅니다
대만의 인기 공포게임 '반교:디텐션'을
영화로 만든 거라고 해요
게임 플레이어들이
퍼즐을 풀어나가며 실마리를 찾아나가듯 주인공들과 함께 빨간 촛불 하나에 의지해서
방과 후 텅 비어 어둡고 무서운 학교를
공포에 떨며 헤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게임과 공포 둘 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영화의 묘한 매력과 분위기에
어느새 끌려 들어가 있어요
반교(返校)의 뜻은
'학교로 되돌아가다'
디텐션(Detention)은
'방과 후 남게 하다'의 뜻이랍니다
1962년 계엄령 시기의 대만이 배경입니다
자유와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는
폭력과 억압의 역사적 비극을
공포로 가득한 학교의 모습에 담았답니다
수상하면 신고하라는
매서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바이 교관이 매의 눈으로 지키고 서 있는
아침 등굣길이 살벌해요
아성의 가방을 열라는 바이 교관 앞에서
머뭇거리는 아성 대신 웨이중팅(증경화)이 꺼낸
인형 덕분에 책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죠
금지된 책을 읽어서는 안 되고
자유를 말해도 안 되는 암흑의 시기에
웨이중팅과 아성과 몇몇 친구들은
장 선생과 인 선생의 지도 아래
'잎이 사랑에 빠지면 꽃이 되고
꽃잎이 경배하면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자유를 안고 태어난다'는
타고르의 시를 읽으며 비밀 독서모임을 하던 중
바이 교관에게 발각이 되어 모두 붙잡혀가고
고문을 당하던 웨이중팅은
악몽에 시달리며 학교를 헤매다가
짝사랑 선배 팡루이신(왕정)을 만납니다
웨이중팅의 악몽 속에서 팡루이신은
비가 퍼붓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붉은 촛불을 들고 어두운 학교를 헤매며
장 선생의 뒷모습을 쫓아가지만
굳게 닫힌 문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요
잠들기 전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 팡루이신은
텅 빈 강당 천장에 매달려 바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다가
후배 웨이중팅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교정의 이름 없는 작은 무덤을 보고
언제 생긴 누구의 무덤인지 의아해하며
텅 빈 학교에서 서둘러 떠나려 하지만
교문 밖은 거친 물줄기로 가로막혀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시 학교 안으로 돌아옵니다
밤의 깊은 어둠을 파헤치듯 비가 퍼부어요
웨이중팅의 악몽 속에서 학교에 남겨진 두 사람은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찾아 헤매며
어두운 학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미로와도 같은 환영과 환상과 환청 속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깊숙이 묻어두었던
지난 일들의 실마리가 하나둘 풀어지기 시작해요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먼지 가득한 학교를 헤매던 두 사람은
독서모임을 하던 창고 열쇠를 빌려주던
가오 아저씨 귀신을 만나는 등
마주치는 귀신들과 괴물들을 통해서
기억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게 됩니다
환영과 환상과 환청은
되살아난 기억의 조각들이고
잊힌 기억 속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는 섬뜩하고 슬퍼서 가슴 아파요
그들이 학교에 남아 악몽에 시달리는 건
깊고 무거운 죄책감 때문이죠
팡루이신의 부모는 매일 싸웁니다
군인인 팡루이신의 아버지는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술과 아내에게 풀고
팡루이신의 엄마는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를
신을 향한 믿음에 기대어 풀어요
그 사이에서 마음 둘 곳 모르던 팡루이신은
장밍후이 선생(부맹백)에게 마음을 기울입니다
늘 수선화를 그리는 장 선생에게
팡루이신이 수선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수선화는 꽃의 생김새가 간결하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남의 시선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대답하죠
외롭지 않냐 물으니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는 장선생에게
팡루이신은 연습장에 건반을 그려서
피아노 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해요
부모의 불화로 마음 기댈 곳 없던 팡루이신은
장 선생에게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고
어딘지 우울하지만 수선화처럼 순수한
팡루이신에게 장 선생의 마음도 기울어요
엄마의 신고로 아버지가 붙잡혀가자
비를 맞고 찾아간 팡루이신에게 장 선생은
'살아있기만 하면 기대할 일이 생기고
어떤 희망이든 찾아올 기회가 있는 거'라고 말하며
하얀 사슴 목걸이를 선물합니다
팡루이신이 가르쳐준 노래를
피아노로 치는 장 선생에게
독서 모임이 발각되면 다치게 되니
팡루이신과 거리를 두라는 인 선생의 조언이
뜻밖에 팡루이신을 오해에 빠뜨리게 되죠
팡루이신을 위해 거리를 두려는
장 선생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인 선생으로 인해
장 선생이 자신을 멀리 하게 된 것으로 오해한
팡루이신은 철없는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혀
사슴 목걸이를 장 선생에게 되돌려 주고
인 선생이 학교에서 파면되기를 바라며
웨이중팅에게 빌린 독서모임의 책을
바이 교관에게 넘기게 되거든요
장 선생과 인 선생의 비밀 독서모임은
오직 자유를 갈망하면서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를 읽으며
어두운 시대의 아픔과 맞섰던 것인데
밀고자는 바로 팡루이신이었고
팡루이신에게 독서모임의 책을 빌려준 학생은
아성이 아니라 웨이중팅이었던 거죠
그날 책 당번은 아성이었는데
아성 대신 웨이중팅이 책을 가져와서
짝사랑 선배 팡루이신에게 건넸으니까요
장 선생의 곁에서 인 선생을 사라지게 하고
장 선생의 사랑을 얻기 위해 철없는 밀고자가 된
팡루이신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텅 빈 강당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잊은 거야?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야?'
잊고 싶었던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
과거의 일들을 되살려 낸 팡루이신은
웨이중팅의 악몽 속에서
여전히 수선화를 그리고 있는 장 선생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요
팡루이신이 잘못하긴 했지만
우리를 죽인 건 아니고
다만 이용을 당했을 뿐이라고
다독이는 장 선생에게
너무 늦었다는 팡루이신은
이제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덧붙여요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기회가 없지만
살아 있으면 희망이 있다'는 장 선생의 말속에서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인 것이고
'이미 죽어버린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가능해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우리를 기억해줘야지'
그 누군가가 바로 고문당하며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돌고 있는 웨이중팅인 거죠
밀고자라는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팡루이신의 영혼은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웨이중팅의 악몽에 나타나게 되었다가
장 선생의 말을 듣고 웨이중팅을 살리기 위해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웨이중팅을 구해냅니다
'왜 기억하려 하느냐'는 바이 교관의 물음에
'웨이중팅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팡루이신의 대답이 슬프고 절박해요
팡루이신의 도움으로 악몽에서 깨어난
웨이중팅은 비로소 학교에서 벗어나지만
팡루이신은 교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며
다시 학교로 돌아갑니다
'넌 살아남아서 모든 걸 기억해야지
살이 있으면 희망이 있다고
장 선생님에게 배웠어'
그렇게 웨이중팅과 작별하는
팡루이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거든요
두 사람이 퍼붓는 빗속에서
학교를 헤매기 시작할 때
교정에서 만난 작고 이름 없는 묘비가
바로 팡루이신의 묘비였던 거죠
팡루이신은 학교에 남고
악몽에서 깨어난 웨이중팅은
감옥에서 피를 토하며 눈을 뜹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 다 말하겠다'고 하죠
살아남아야 하니까
살아남아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므로
그렇게 그는 살아남은 자가 됩니다
살아남은 웨이중팅이 마무리하는
영화 장면들이 슬프고 아련하고
쓸쓸하고 먹먹해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고
어느덧 중년이 된 웨이중팅은
늦었지만 장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 선생의 무덤을 찾아 인사를 건네고
폐허가 된 채 곧 사라지게 될
학교를 찾아갑니다
우리에겐 이기적 욕구도 있으나
애타적 욕구도 있다고 말한 '고민의 상징'
책을 찾은 웨이중팅은
아직도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실에 갇혀 있는 팡루이신의 영혼과 마주 앉아
장 선생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전하는데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장 선생은
팡루이신을 위해 쓴 마지막 편지를
웨이중팅에게 남겼거든요
'고민의 상징 책 속에 편지를 넣어두었어
넌 꼭 살아남아 편지를 대신 전해줘야 해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살아 있겠다고 약속해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거야
먼저 간다'
장 선생이 건네는 작별 인사의 먹먹함이
그대로 살아남은 웨이중팅에게
그리고 팡루이신의 영혼을 위해 전해집니다
먼지로 뒤덮인 수선화 액자 뒤에 숨긴
'고민의 상징' 챡 속에서 찾은
장 선생의 마지막 편지는 애틋합니다
'하얀 사슴이 수선화에게
이번 생은 인연이 없으니 다음 생에 만나자'며
장 선생이 남긴 편지를 읽고
함께 전해진 사슴 목걸이를 목에 거는
팡루이신의 그렁한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기억할게요'
웨이중팅의 다짐에
팡루이신은 희미하게 웃어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거듭 다짐하는 웨이중팅을 향해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해맑게 웃는
팡루이신의 얼굴이 한 송이 수선화 같아요
하얀 사슴 장 선생이 작별 인사로 남긴
편지 말미의 '자유가 올 때까지'로
영화는 슬픔의 막을 내립니다
악몽 속에서 찾아낸 밀고자의 아픔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비극적인 역사는
공포보다 더 진한 슬픔을 담고 있어요
'반교:디텐션'은
아픈 기억의 늪에서 건져 올린
어둡고 비극적인 역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슬픔과 용서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 선생의 편지에 담긴 진심을 안고
팡루이신의 영혼도 이제는 학교를 떠났을 테죠
살아남아 그 아픔을 온전히 기억한
웨이중팅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을 테니
기억은 강물이 되어 이어져 흐르더라도
슬픔은 서서히 희미해져 갈 거라고 생각해요
잠시 눈을 가리거나 화면을 가려야 하는
섬뜩한 장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먹먹하고
보고 나니 서늘한 여운이 남습니다
게임에는 별 흥미가 없지만
게임 스토리를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