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93 청춘은 아름다워라
영화 '동주'
엄마네 아파트 화단에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돌조각이 있어요
봄이 오면 봄볕이 따사롭게 머무르고
여름날 초록 바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잎도 하나 스쳐가고
한겨울 희고 고운 눈이 눈썹처럼 쌓이기도 해요
흑백영화가 건네는 부드러운 차분함 속에
담백한 진심이 담긴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은 흑백영화인 것에 대해
'컬러는 윤동주를 현재로 불러오는 듯한 느낌이고
흑백은 현재의 우리가 그 시대로 가는 것이라
윤동주는 그 자리에 있는 게 맞다'고 했답니다
흑백영화를 보며
잠시 시간여행을 떠난 우리가 걸음걸음
그 시절의 윤동주 시인을 만나러 갑니다
강하늘과 박정민 두 배우의 조합은
아름답고 풋풋합니다
청춘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슬프고 짧아서 더욱 애틋합니다
차디찬 감옥의 창살 사이로
밤하늘의 뭇별들을 내다보며
'별 헤는 밤'을 외우는 수인번호 475
일본 형사의 심문을 받으며
윤동주가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발걸음이 먹먹해지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사이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동주의 편지글이
독백처럼 잔잔히 이어집니다
좋아하는 시인 누구? 묻는 여진(신윤주)에게
'다 좋아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섬세하고 여리고 순수한 모습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시인 윤동주
'동주(강하늘)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박정민)도 세상을 사랑해서'라는
여진의 다정한 위로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밤길이
고즈넉이 아름다워요
'몽규에게 얻어 읽은 동주의 시가 좋은데
읽고 나서 좀 쓸쓸해졌다'는 여진의 말에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동주와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였다며
하하 웃는 몽규는 동갑내기 사촌 사이로
한 마을에서 태어나 친구처럼 자랍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 거니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강인한 몽규는
마음 여린 동주에게 넘사벽으로 느껴졌을까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잠이 든 누이동생과 어린 아우를 보며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라고 쓴
'아우의 인상화'를 나직이 외워봅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어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철부지 어린 아우가 맞이하게 될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절절합니다
동주는 히라야마 도쥬가 되고
몽규는 소무라 무케이가 되어
일본 유학을 떠나죠
동주에게 워즈워드의 방랑에 대해 물으며
개인의 내면의 힘이 모여
세상을 움직인다는 말씀 끝에
다카마쓰 교수가 '시를 써보면 어떠냐'고 권하자
'사실은 시를 쓰지만 아직 시집을 출간하지 못해 시인은 아니라'고 대답하는 동주에게
'조선어라서 출판하지 못하는 거 아니냐'는
말씀이 뼈를 때리듯 아파요
동주의 시를 영어로 번역해서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다는 쿠미(최희서)에게
겁 없는 모습이 친구를 닮았다고 동주가 웃자
'그 친구도 동주의 시를 좋아하나 보다'고
말하며 쿠미도 따라 웃죠
완성된 번역 원고를 가지고 온 쿠미에게
시집이 출간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쿠미가 시집 제목을 묻는 순간
문이 열리고 형사가 나타납니다
'너는 송몽규의 그림자밖에 안 되는 인물'이라는
형사의 말이 동주에게 날카로운 아픔으로 꽂힙니다
형사가 내미는 서류를 손으로 찢어 구기며
동주가 하는 말이 몹시 안타까워요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학생 시절 동주가
여진과 함께 찾아가서 들었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정지용 시인의 말씀이 별 하나처럼
반짝 떠오르는 순간이죠
면회를 온 동주와 몽규의 두 아버지에게
동주는 죽었다는 몽규의 슬픈 목소리가 전해지고
동주의 시신을 확인하는 아버지의 설움과
'별 헤는 밤' 시의 구절들이 아프게 어우러져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카페에서 냅킨에 써 주는
시집 제목을 받아 든 쿠미가
어떻게 읽느냐고 묻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문소리가 나고 잠시
짧고도 깊은 정적이 흐른 후
'시'~라고 말하는 동주의 얼굴이
그 시절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배경보다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
흑백영화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어서 '동주' OST와 함께 흐르는
엔딩 크레디트로 윤동주와 송몽규
두 주인공의 생애와 자료 사진이 소개되며
아쉬움으로 마무리하는 영화 '동주'
못 다 핀 청춘도 아름다워요
활짝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일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그의 청춘은 더욱 눈부시게 찬란합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흘러도
시들거나 저물지 않는 청춘의 날들 속에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