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92 작은 배처럼 흔들리며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흔들리고
그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막막하지만
걷다 보면 하늘거리는 들꽃 한 줌도 만나고
스치는 바람에 햇살 안고 나풀대는
노랑나비도 만납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픈 다리를 쉬어갈 자리도 있어서
투덜거리며 혼잣말을 할 수도 있고
숨어서 몰래 듣는 나만의 노래도
중얼대듯이 불러볼 수 있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영화는
늘 그렇듯이 잔잔함 속에 풍랑이 머무르고
거침없이 현실적이고 투명하게 솔직하면서도
어딘가에서 비밀이 툭 터져 나오면서
안타깝게 조금씩 어긋나기도 하지만
어김없이 정겹고 따사롭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가족 이야기니까요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는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뜨거운 여름 고향집에 모이는 가족들은
서로를 향해 걸어도 걸어도 더 이상은
마음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이름 가족입니다
장남 준페이를 가슴에 품고 사는
엄마 토시코(키키 키린)와
은퇴한 동네 의사인 아버지 쿄헤이(하라다 요시오)
삶이 변변찮은 작은아들 료타(아베 히로시)와
전남편의 아들 아츠시를 데리고
재혼한 며느리 유카리(나츠카와 유이)
귀여운 딸이지만 제 몫만 챙기는 지나미(유)와 백년손님인 사위 노부오(다카하시 카츠야)
그리고 유카리 전남편의 아들 아츠시와
준페이 대신 살아나 변변찮은 청년이 된
요시오(다구치 토모야)의
여름날 하루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믿음직한 장남 준페이가
햇볕 쨍한 여름날 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물에 빠진 어린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요시오 대신 허우적대다가 저 세상으로 간 지
어느덧 십수 년이 훌쩍 지났어요
저마다 가정을 꾸린 동생 료타와 지나미는
매년 여름이면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고향집에 다니러 옵니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지만 각자의 입장과 처지가 다르니
저마다 끌어안고 있는 속내도 다르고
강물처럼 조르르 흐르는 세월 따라
슬픔까지도 안으로 스며들어
잔잔해지고 잦아든 듯 보입니다
가족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달콤 시원한 수박도 한바탕 쪼개 먹고
파사삭 소리까지 맛있는 옥수수튀김도 해 먹으며
재미나게 옛 추억을 나누기도 하죠
그러나 가족사진을 찍자는 말에
준페이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나오는
엄마 토시코의 표정은 여전히 먹먹합니다
준페이의 무덤에 다녀오며
오르막길이 힘들다는 엄마 토시코는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보고 싶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료타에게는 아직 차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춤이라도 추듯이 나풀대는
노랑나비 한 마리를 만나자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라는
엄마 토시코의 말에
눈 시리게 밝아지는 한 줌 햇살 위로
쌉싸름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저녁 식사 자리에서 뜬금없이
턴테이블에 걸어달라며
엄마 토시코가 슬며시 료타에게 건네는
LP에 담긴 노래는 'Blue Right Yokohama'
영화 제목인 '걸어도 걸어도'는
엄마 토시코가 혼자 즐겨 듣던 노래
'Blue Right Yokohama'의 가사인데
엄마에게는 아픈 사연이 깃든 노래랍니다
젊은 시절 어린 료타를 등에 업고
바람이 난 남편 뒤를 쫓아갔을 때
안에서 들려오던 노래였거든요
홧김에 산 LP에 담긴 그 노래가
엄마 토시코가 애정하는 노래가 되었다니
미움이나 원망도 세월의 발걸음에
빛바래고 무뎌지나 봅니다
'요코하마 푸른빛의 요코하마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누구에게나 숨어서 듣는
노래 하나쯤 있기 마련'이라는 유카리는
사별한 전남편의 아들 아츠시에게
'죽었다고 없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 역시 사별한 전남편을 생각하며
숨어서 혼자 듣는 노래가 있는 것이죠
'요시오 이제 그만 오라고 해도
되지 않느냐'는 료타의 말에
엄마 토시코는 비로소
십여 년 동안 꼭꼭 접어 간직하고 있던
아픔과 진심을 드러냅니다
'겨우 십수 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일 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 해서 벌 받지 않아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만들 거야'
엄마 토시코의 상실감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둡고 아프고 묵직한 거죠
아츠시가 왜 의사가 되고 싶었냐 묻자
아주 옛날에~라고 료타는 말끝을 흐리고 말아요
동네 의사인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장남 준페이를 잃고
료타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품 복원사가 되었거든요
지금은 실직 중이라
아버지가 기대하고 엄마가 의지하던
형 준페이의 빈자리를 대신하지 못하는
료타는 이래저래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거죠
서먹한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혀보려고
축구장에 함께 가자고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아요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유카리가 딸을 낳아 진짜 부모가 된 료타는
가족과 함께 형 준페이의 무덤을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자동차로 오릅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자고 했던
축구장에 가지 못했고
엄마에게 자신이 운전하는
차를 태워드리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지만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형의 무덤을 찾아
고향에 다니러 온 료타는
노랑나비를 보고 엄마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딸에게 들려줍니다
엄마 토시코가 노랑나비를
준페이의 영혼이라 믿었듯이
료타도 나풀대는 노랑나비를 보며
엄마의 영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엄마 토시코 생전에
어느 스모 선수 이름이 무엇인지
얘기하다가 기억해내지 못한 료타가
나중에 버스에서 이름이 떠오르자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중얼거리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렇게 자식들은 늘 한 걸음씩 늦고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부모가 기다리고 싶어도
무심한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한 발씩 늦더라도
그래도 조금 늦게라도 닿을 수 있는
부모님과 자식이 곁에 있을 때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서고
다정히 손 내밀어야 하는 거죠
더없이 소중하지만
때로 번거로워 놓아버리고 싶기도 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닿은 듯하다가 다시 또 저만치 멀어져
결코 닿을 수 없는 사이라고 해도
가족은 가족이니까요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들처럼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조금씩 어긋나더라도
남겨진 이들은 그대로 남아서
떠난 이들을 아쉬움으로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저마다의 마음과 걸음으로
걸어도 걸어도 덧없는 길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Blue Right Yokohama'
노래 가사처럼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매 순간 흔들리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