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30 다나에 공주를 아시나요
핫핑크도 시들어요
공주과도 아니면서
핫핑크 지갑에 마음이 꽂혀
일단 사서 서랍에 고이 넣어두고
생각날 때 한 번씩 꺼내 봅니다
지갑을 산 게 아니라
꽃 같은 핑크를 산 셈이죠
지갑 안에 카드나 현금 대신
한때의 추억과도 같은
꿈의 뽀시래기들이 들어 있어서
애틋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듯
텅 빈 지갑을 열어 봅니다
비어 있으나 가득 찬
마음의 지갑입니다
그런데요
꽃이 이울고
기억이 흐려지듯
핫핑크도 시들어요
평소에 납작 카드지갑 하나
주머니에 넣어 다니다 보니
두툼 지갑은 그다지 쓸모가 없어
가만 넣어두기만 했는데도
지갑 겉면의 핑크꽃들이
어느덧 시들어요
고운 핑크빛이 꽃무룩
시간의 손 잡고 스르르 날아가서
꽃송이들이 희끄무레해진 모습에
덩달아 나도 시무룩
사람이 나이 들어 시들어가듯
서랍 속 지갑도 나이가 들어갑니다
사람 마음처럼 속은 그대로인데
겉모습만 빛이 바랜 지갑을 보며
씁쓸해지는 내 맘은
그러나 여전히 핫핑크~
세월 지나 나이 들수록
꽃 같은 겉모습은 시들어도
꽃심 같은 속마음은
그대로 제자리걸음이니
이를 어쩔~
흐르는 시간에 부딪쳐
기억의 모서리는 닳아 뭉개져도
그 안에 간직한 꿈은 빛바래지 않고
여전히 고운 핑크입니다
핑크 지갑을 보고 있으면
문득 다나에 공주가 떠올라요
신화 속 공주도 많고
역사 속 공주도 수두룩
동화 속 공주도 많고 많은데
하필 그리스 신화 속
다나에 공주가 떠오르는 건
대체 왜일까요
아리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와
유리디케 왕비의 딸이
다나에 공주인데요
쨍한 핫핑크처럼 사랑스러운 공주는
손자의 손에 죽는다는 신탁을 받은
아버지가 청동으로 된 방에 가두지만
황금 소나기로 스며든 제우스를 만나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아요
신탁을 굳게 믿은 아버지 왕은
다나에 공주와 손자를 상자에 넣어
매정하게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누구?
신들의 왕 제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부탁해
세리포스 섬까지 무사히 배송 완료~
사랑과 운명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과 운명과 시간의 힘은
황금 소나기와도 같아서
다나에 공주도 아닌 지갑을
서랍 속에 갸두어도
시간의 햇살 어김없이 파고듭니다
빛바랜 핑크지갑 앞에 두고
사랑이니 운명이니
뜬금 공주놀이는 이쯤에서
소공녀의 멋진 말로 마무리합니다
빛이 바랬더라도
핑크는 핑크
마음이 공주이면
누구나 공주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