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96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

by eunring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던 시절

나는 너무 어리고 철없어서

부조리와 순수 사이에서 흔들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 홀든의 정신적 일탈과 방랑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했어요


기억나는 것은 귀여운 여동생 피비가

오빠는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자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놀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홀든의 감성적인 대답인데요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맹이들이

재미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만 무수히 많고

주위에 어른은 오직 나 혼자뿐인 거야

위태롭고 아찔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다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고 싶어

아이들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거든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거지'


고독한 천재 작가인 샐린저의 삶과

'호밀밭의 파수꾼' 작품 탄생의 과정을 그린

매력적인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를 보면서

다시 시간을 내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찬찬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는

푸르뎅뎅한 새벽의 빛으로 시작해요

어스름 밝아오는 빛에 기대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샐린저의 손이 파르르 떨립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그의 불안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제리 샐린저(니콜라스 홀트)는

부유한 유태인 아버지 아래서 유복하게 자라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며 낙제와 자퇴를 반복하고

대학에서도 쫓겨나 방황하게 됩니다


샐린저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우나 덕분이죠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고 사교계의 별인

우나 오닐(조이 도이치)을 보고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랍니다


작가 지망생인 그에게 관심 1도 없는

사교계의 스타 우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유명 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그는

현실적인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 덕분에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베넷 교수(케빈 스페이시)로부터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평생 글쓰기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쓰게 되었다고 하죠


베넷 교수는 실제로 작가가 되려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거절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출판을 거절당하고 방황하는 그에게

'네가 읽고 싶은 소설을 쓰라'고 하죠


그래서 그는 쓰고 또 씁니다

왜 글을 쓰고 싶냐고 묻자

'화난 제 마음을 표현하려고요'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하면서도

글 쓰기를 멈추지 않던 그는

마침내 단편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고

작가로서 우나의 마음도 얻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보병으로 참전한 후

배우를 꿈꾸던 연인 우나가

채플린과 결혼했다는 소식에 주저앉고

전우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에서 늘 종이와 펜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써 나갑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좋은 점 하나가 그것이다

마음은 계속 이야기를 써나간다는 것

손에 펜이 들려있든 총이 들려 있든

창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며

편지로 버넷 교수의 조언을 받기도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까지

글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던 그는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다가 명상을 통해 극복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유명해지게 되죠

하지만 번잡해진 삶을 견디지 못하고

뉴욕을 떠나 은둔합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그는

성공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뉴햄프셔 시골마을에서 은둔하며

아내 클레어와 함께 지내죠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오로지 글쓰기에 몰입하느라

아내 클레어와도 갈등 끝에 이혼하고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과 단절된 고독한 삶을 살았답니다


'저는 남편이 되는 법도 몰라요

아버지가 되는 법도 모르고

심지어 친구가 되는 법도 몰라요

아는 거라곤 글쓰기밖에 없어요

만약 아무 보상 없어도

글쓰기에 삶을 바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보다 성스러운 건 없다고 생각하며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었던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오직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면서

완벽함을 성취하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고 했던 걸까요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유명 작가가 되었으나

평생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호밀밭을 지키는 파수꾼이 그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글을 썼던 걸까요?


베넷 교수가 스무 살 샐린저에게 던진 질문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평생 글 쓰는 데 바칠 수 있는가?'

영화의 말미에서 그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대가가 없더라도 평생 글을 쓰겠다고~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외딴집에서

계속 글을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으며

오직 글쓰기를 위한 글을 썼다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지키고 싶었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차분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읽다 보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희미하게 보일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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