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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Dec 31. 2023

초록의 시간 663 잎사귀 아래 꽃을 숨기다

영화 '일대종사'

저무는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인생의 적막함을 닮은

영화 한 편을 봅니다

'일대종사'


양조위의 아름다운 무협 영화랍니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하고

양조위가 엽문을 연기하는 '일대종사'는

견자단의 '엽문'과 어떻게 다를까 싶어

나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다가앉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무술인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

견자단 주연의 영화 '엽문'은

1, 2, 3편과 외전까지 있고

양조위 주연의 영화 '일대종사'는

역시 엽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궁이(장쯔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고

궁이와 연인 사이일선천(장첸)도 나옵니다


엽문과 궁이의 만남으로 시작해

엽문과 궁이의 마지막 만남까지 보여주는

영화 '일대종사'는 아름답고

적막하고 허무합니다

덧없음으로 나부끼는 잎사귀 아래

붉은 꽃잎처럼 곱게 숨어 있는

인생의 화양연화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배우들이 무술을 연마하여 

대역 없이 무술 장면을 찍었다고 하는데

엽문과 궁이의 대결은 아름답고 우아해요

그리고 봉천역에서 이루어지는

궁이와 마삼의 대결은

기차가 멈추고 달리기 시작하는

선로 바로 곁에서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 


궁가 64수의 후계자로

무술을 통해 엽문교감하는

궁이슬픔은 야무지게 빛나고

가난과 고난에도 기품 있는 미소를 간직한

엽문의 아내 장영성(송혜교) 

소리 없는 눈물 연기도 일품이고

일선천을 연기하는 장첸도 멋집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매력적인 데다가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마디마디 철학적이고

시처럼 유려해서 빠져드는데

영상미 또한 그림처럼 빼어납니다


영춘권의 전설이라 불리는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이랍니다

일대종사는 무술의 문파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스승을 일컫는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해요

엽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허구의 인물인 궁이도 함께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합니다


중국 청나라가 몰락하고

제국열강들중국을 노리던 시기에

중국 내부의 들끓는 혼란 속에서

무림 고수들의 삶과 사랑이

처연하게 아름답습니다


궁이의 아버지 궁보삼은

북방 권법의 고수로

형의권과 팔괘장을 완성하고

광동의 불산으로 엽문을 찾아와

은퇴식을 한 후 엽문에게

자신의 후계 자리를 물려줍니다

등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이 자부심으로 반짝입니다


마주 앉은 엽문과 궁이는

아름다운 무술 대결을 시작합니다

엽문의 빠름과 궁이의 우아한 부드러움

발놀림까지 정교한 엽문과

야무진 눈빛으로 맞서는 궁이

두 사람의 대결은 고요하면서도

격렬하고 치열합니다

궁이가 대결에서 이기는데요


차분히 느릿느릿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잎사귀 아래 꽃을 숨기고

꿈속에서 숱하게 눈밭을 헤맨다~  

엽문의 말에 궁이는 답합니다

약속은 산보다 무겁다~


1938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그들의 인생은 봄에서 바로 겨울이 되고

두 사람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궁이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했던

새 옷을 팔고 나니 떨어진 단추 하나가

안타까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불리는

엽문은 광둥성 불산 출신으로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무술을 시작했답니다

일곱에 권법 마흔에 산을 넘었는데

넘기 어려운 산은 생활이라는 이름의 산이고

대일 항전 8년간 모든 걸 잃었다~ 그는 

돈과 친구 그리고 가족마저 다 잃어요

두 딸은 굶주림으로 숨을 거두고

소리 없이 우는 의 슬픔이 먹먹합니다


불산에서 활동할 때는

제자를 기르지 않았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가족과 친구와

재산을 모두 잃고 무술로부터 멀어지다가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생계를 위해

강습회를 열어 제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무공은 곡예가 아니니

떠돌이에게는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죠


섣달 그믐날 밤

홍콩에서 년 만에 만나는

궁이와 엽문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이 안타깝습니다


궁가 64수를 다시 보고 싶다며

그는 전쟁이 나는 바람에 

궁이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준비했던 외투는 팔아넘길 수밖에 없어

단추 하나 남았다고 기념이라며 건넵니다

단추 하나의 쓸쓸함이 떼구루루~


인생무상이라며 궁이는 말하죠

무예가 아무리 높은 들

하늘보다 높겠으며

재능이 제아무리 깊다 한들

땅보다 깊겠냐~


마지막으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경극을 봅니다

풍류는 꿈과 같고 악기보다 목소리리며

기쁨과 슬픔 이야기가 노래보다 좋다는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호랑이는 산을 향해 작별하지 않으며

타향살이에 지쳐 고향으로 가고 싶다며

그의 단추를 돌려줍니다

64수는 이미 잊었으나

가장 행복할 때 그를 만난 건 행운이고

후회가 없으면 얼마나 재미없겠냐는 말 끝에

그를 마음에 담은 적이 있다는

무덤덤한 고백을 건넵니다


인생은 바둑처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짧은 인연은 바둑판처럼 남겨 두자고

작별 인사를 건니는 궁이의 눈물을 바라보며

엽문의 마음에도 한줄기 눈물이 고였을까요


나란히 밤길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섣달 그믐날처럼 적막합니다

수련의 단계에서 자신은 

끝까지 가지 못했으니 남은 길은

당신이 기라는 말에 엽문은

대답 대신 빙긋 웃어요

이곳이 무림과 다를 게 뭐냐고

그녀가 덧붙입니다


아버지의 무술을 보고 배우며

뼈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궁이는

팔괘는 잔인하다며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혼자 연마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빠져들어

몰래 무술을 연마하며 자랐는데

눈꽃이 매달라 나무들 사이에서

어린 그녀가 본 것은

아버지의 무공이 아니라 뜻이었다고 해요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권법은 두 단어 수평과 수집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최후의 승자가

수직으로 서 있을 수 있다고

멋들어진 중절모를 눌러쓰고

자신을 엽 아저씨라 불러도 된다는

적당히 나이 든 엽 아저씨의 미소가

적막하게 아름다워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무예가 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보다 높을 수 없고

재능이 깊다 한들

땅보다 깊을 수는 없다는 말을

곰곰 되새겨보는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림의 고수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저마다

한 번뿐이고 하나뿐인 자신의 인생에서

그 누구도 기웃대거나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일대종사가 아닐까요


푸른 꿈이 높아봤자 하늘 아래

인생이 고달파도 땅 위라 생각하면

아쉬운 대로 견딜 만한 인생이라고 

중얼거리며 잎사귀 아래 꽃을 숨기듯

올 한 해를 단정하게 여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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