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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Jul 24. 2024

초록의 시간 812 철부지 소녀 감성

영화 '나의 펜싱 선생님'

TV에서 펜싱 경기를 볼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어요

갈래머리 학생 시절

학교 강당에서 열리던 펜싱 경기를

창문 너머로 친구들과 바라보며

달타냥이다~ 삼총사다~

소곤거리며 까르르 웃곤 했거든


와우 멋지다~

낭만적이야~라고 감탄하던

어설픈 철부지 소녀 감성이

추억의 비눗방울처럼

뽀그르르 피어오릅니다


낯설고 먼 나라 에스토니아

그리고 멋진 펜싱 선생님 이야기라니

예술적인 올림픽을 며칠 앞둔

비 오는 날 멍 때리며 들여다보기에

딱 좋은 영화 '나의 펜싱 선생님'


이국적인 풍광이 아름답고

진주알처럼 희고 예쁜 아이들의 모습이

해맑은 슬픔으로 야무지게 응어리진

영화 '나의 펜싱 선생님'은

에스토니아의 아픈 역사와

펜싱 선수 엔델 넬리스의

실화가 담긴 핀란드 영화랍니다


멀고도 낯선 나라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북유럽 영화다운 색감과

잔물결 같은 잔잔함에

스르르 마음이 기울어요


지도를 보니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핀란드와 가까이 마주 보는 에스토니아는

발트해의 조그만 나라인데요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며

고생 좀 했군요


독일에게 점령당하면 독일군으로

다시 소련에게 점령당하면

소련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비극을 겪다가

나치가 망하고 소련이 승전국이 되면서

에스토니아에서 독일군으로 징집된

사람들을 찾아 수감 처벌하게 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독일군에 강제 징집당했던

주인공 엔델(페르트 아반디)은

펜싱 선수였으나 펜싱도 그만두고

비밀경찰에 쫓기며 에스토니아의

작은 시골학교에 숨어 신분을 숨기고

체육을 가르지게 됩니다


나무 막대기로 펜싱 검을 만들어 가며

펜싱클럽을 연 엔델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 속에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아버지들은 전쟁으로 죽거나 끌려가 집에 없고

엄마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기 바쁘죠

아이들은 펜싱이라는 놀이에

진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펜싱을 배우고 싶어 하는

(요나스 코프)의 할아버지(렘비트 울프삭)가 학부모회의에서 투표를 하자는 장면에서

교장(헨드리크 톰페레 시니어)은 펜싱이 반사회주의적 엘리트 운동이라며 반대하지만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모습을 보며

마을사람들은 적극 응원하게 되죠


펜싱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리감이라는데요

아뿔싸 엔델은

아이들과의 거리 두기에

안타깝게도 그만 실패합니다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는

아이들의 눈빛에 빠져들고 말아요


레닌그라드로부터

펜싱대회 소식이 날아오고

엔델은 갈등에 빠집니다

아이들의 희망을 위해 참가하고 싶으나

참가하면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게 되는

위험 상황이니까요


그에게는 절친 알렉세이가 있어요

함께 달아나자고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위해 남고

교장은 그가

독일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죠


얀의 할아버지 잡혀가며

얀에게 귓속말로

'너도 다 컸으니 이제

네가 가족들을 지켜주렴

펜싱선수가 되면 괜찮을 거야'


 쌓인 물가에서 그는  여자친구 

카드리(우르술라 라타셉)에게 고백합니다

'18세에 징집이 되어 숲에 살다가

운 좋게 종전이 되자 빠져나가

레닌그라드에서는 엄마 성으로 지냈는데

평생 숨어 지내는 것에 지치고

날 믿고 의지하는

애들을 위해 가야 한다' 그에게

아빠처럼?이라고 물으며

그녀가 덧붙입니다

'아빠들이 돌아오지 않을 

애들 눈빛을 생각해 보라'고~


펜싱클럽의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잡혀가고 엄마는 일에 바쁘죠

그래서 더더욱 가야 한다고 

아이들의 꿈을 위해

그는 가기로 결정합니다


시합 중 경찰이 잡으러 오고

교장은 떠나라고 기회를 주지만

그는 아이들 곁에 함께 합니다

경기에서 앞서가다가 발목을 다친  

얀을 대신하는 마르타와 주고받는

눈빛 대화가 뭉클 장면입니다

'네가 대신 싸워서 이겨

그러려고 왔잖아'


야무진 눈빛의 마르타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는데요

박수와 환호 속에서 엔델은 잡혀갑니다

돌아보는 엔델을 바라보는 아이들

 마르타의 눈빛은 선생님이 아닌

아버지를 보내는 눈빛입니다

 아이들을 두고

그는 멀어져 갑니다


'1953년 강제 노동 소용소의 

수백만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자막에 이어

기차를 타고 돌아온 엔델을

얀과 소년소녀들이 반겨줍니다

기다리는 카드리와 마르타와

꼬맹이들의 모습이

설렘과 기쁨으로 화사합니다


안개 자욱한 기차역에서 말없이 웃으며

다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에 이어

'엔델은 1993 사망

에스토니아 독립 2년 

그가 창단한 펜싱클럽은

지금도 운영 중'이라는 자막으로 

훈훈한 마무리~


잠시 낯설고  먼 나라

에스토니아에 훌쩍 다녀오며

덤으로 갈래머리 소녀시절로 다녀온

영화 여행과 시간 여행이

안타깝고 애틋하면서도

잠시 행복했어요


누군가의 마음을 느껴보고

낯선 어딘가의 풍경 속을 거닐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는

마법의 순간이 있어서

영화는 나만의 매직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서

허무한 만큼 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순간의 현실은 온전히

내 몫의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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