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13 긴 머리 소녀
서툰 열정이 예뻐서
해가 반짝 나는데
갑자기 빗방울 후드득후드득~
해가 나면서 비가 오면
무서운 호랑이 장가가고
여우 시집간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할머니께 들으며
호랑 신랑에 여우 각시가
겁나 신기했었는데요
요즘 같아선
호랑 신랑도 부족하고
여우 각시도 모자랄 것 같아요
날씨 변덕이 그야말로 시시각각
죽 끓듯 하며 비 그림 몰려다니고
습한 더위 솜뭉치처럼 뭉쳐 다니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날씨라서
우양산은 필수 아이템입니다
빗줄기 갑자기 쏟아져도
다행히 손에 양우산 들었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펴고
그래 인생은 준비야~
의기양양 빗길을 걸어가는데
앞에서 오던 긴 머리 소녀
우산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뛰지 않고 천천걸음이 여유롭습니다
머리와 교복이 흠뻑 젖는데도
늘어뜨린 긴 마리 사이로
피삭 웃는 모습이 시크 뿜뿜
쏟아지는 비 따위 겁나지 않다는 듯
풋풋한 청춘이 용감무쌍
빗사이로 막 가는 중입니다
같은 방향이면
우산을 씌워줄까 생각하다가
가는 방향도 다른 데다가
내가 꽃소년이 아니라
멋진 우산 장면이 나올 수도 없고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으니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비 맞으며 오는 소녀
무심히 스쳐 지나는데
우린 참 서툰 청춘이었노라고
엊그제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서툴지만 열정적이지 않고
늘 데면데면 무심한 청춘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서투르면서도
격렬하진 않다는 내 말에
친구의 답이 이랬어요
그땐 우왕좌왕 좌충우돌이었지
격렬하다거나 열정적이라고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렇군요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우산 없이 의연할 수 있는 게
겉보기에는 여유로우나
속에선 혼자 우왕좌왕
마구 좌충우돌이리라 생각하며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긴 머리 소녀는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어요
소녀의 서툰 열정이 예뻐서
한참 바라봅니다
나중에 그 소녀가 어른이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까요
사실 아침에 엄마가 넣어 주신
우산 하나 가방 안에 있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걸었지~
뛰어가자니 이미 다 젖어버려서
눈 딱 감고 멋진 척 좀 했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서
허무했을 뿐~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잘생김 얼굴에 묻힌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짜잔~ 나타나
내 허락도 없이 우산을 씌워 주며
그윽한 눈빛을 건네거나
겉옷이라도 촤라락 펄럭이며
머리에 두르고 함께 뛰어가는
인생 명장면을 기대했으나
현실은 영화가 아님을
그때 이미 깨달았어~
나중 나중에 소녀가
이렇게 중얼거릴 것만 같아요
그때 비 흠뻑 맞기 정말 잘한 것 같아
갑자기 비가 쏟아질 때
귀찮고 번거로워도 우산을 꺼내
빗줄기를 가려야 한디는 걸
제대로 배웠거든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비를 만날 수 있고
내게 쏟아지는 비는
내 우산으로 가려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