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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Jul 25. 2024

초록의 시간 813 긴 머리 소녀

서툰 열정이 예뻐서

해가 반짝 나는데

갑자기 빗방울 후드득후드득~

해가 나면서 비가 오면

무서운 호랑이 장가가고

여우 시집간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할머니께 들으며

호랑 신랑에 여우 각시가

겁나 신기했었는데요


요즘 같아선

호랑 신랑도 부족하고

여우 시도 모자랄 것 같아요

날씨 변덕이 그야말로 시시각각

죽 끓듯 하며 비 그림 몰려다니고

습한 더위 솜뭉치처럼 뭉쳐 다니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날씨라서

우양산은 필수 아이템입니다


빗줄기 갑자기 쏟아져도

다행히 손에 우산 들었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펴고

그래 인생은 준비야~

의기양양 빗길을 걸어가는데

앞에서 오던 긴 머리 소녀

우산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뛰지 않고 천천걸음이 여유롭습니다


머리와 교복이 흠뻑 젖는데도

늘어뜨린 긴 마리 사이로

피삭 웃는 모습이 시크 뿜뿜

쏟아지는 비 따위 겁나지 않다는 듯

풋풋한 청춘이 용감무쌍

빗사이로 막 가는 중입니다


같은 방향이면

우산을 씌워줄까 생각하다가

가는 방향도 다른 데다가

내가 소년이 아니라

멋진 우산 장면이 나올 수도 없고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으니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비 맞으며 는 소녀

무심히 스쳐 지나는데

우린 참 서툰 청춘이었노라고

엊그제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서툴지만 열정적이지 않고

늘 데면데면 무심한 청춘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서투르면서도

격렬하진 않다는 내 말에

친구의 답이 이랬어요

그땐 우왕좌왕 좌충우돌이었지

격렬하다거나 열정적이라고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렇군요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우산 없이 의연할 수 있는 게

겉보기에는 여유로우나

속에선 혼자 우왕좌왕

마구 좌충우돌이리라 생각하며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긴 머리 소녀는

여전히 느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어요

소녀의 서툰 열정이 예뻐서

한참 바라봅니다


나중에 그 소녀가 어른이 되면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까요

사실 아침에 엄마가 넣어 주신

우산 하나 가방 안에 있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걸었지~


뛰어가자니 이미 다 젖어버려서

눈 딱 감고 멋진 척 좀 했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서

허무했을 뿐~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잘생김 얼굴에 묻힌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짜잔~ 나타나

내 허락도 없이 우산을 씌워 주며

그윽한 눈빛을 건네거나

겉옷이라도 촤라락 펄럭이며

머리에 두르고 함께 뛰어가는

인생 명장면을 기대했으나

현실은 영화가 아님을

그때 이미 깨달았어~


나중 나중에 소녀가

이렇게 중얼거릴 것만 같아요

그때 비 흠뻑 맞기 정말 잘한 것 같아

갑자기 비가 쏟아질 때

귀찮고 번거로워도 우산을 꺼내

빗줄기를 가려야 한디는 걸

제대로 배웠거든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비를 만날 수 있고

내게 쏟아지는 비는

내 우산으로 가려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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