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98 바람의 깃발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2 바람개비

by eunring

오고 가는 바람도

시작과 끝이 있을 테죠

고단한 시간의 종종걸음도

어느덧 끄트머리에 와 있듯이


가고 오는 시간의 끝은

다음 해의 시작과 맞물려 이어지고

덧없이 흘러간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마음과 발걸음은 깊은 회한으로 서성이지만

첫걸음은 분명 설렘으로 시작했을 테죠

눈보라를 안고 걷는 겨울 나그네에게도

첫걸음과 마지막 걸음이 있듯이


바람의 손길 드세지는 겨울 풍경 속에서

우리 모두가 겨울 나그네인 셈이니

감미롭고 슬프고 무겁고 울적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춥고 시린 이 겨울날과 잘 어울립니다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서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슈베르트가 잠시 사라졌답니다

친구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수 끝에 나타난 슈베르트의 손에는

'겨울 나그네' 악보 뭉치가 들려있었대요


슈베르트의 연주를 듣고

다섯 번째 곡인 '보리수'는 좋은데

다른 곡들은 너무 어둡고 쓸쓸하고 울적하다고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언젠가는 모두 좋아할 거라고

슈베르트는 말했다고 해요


사랑을 잃고 쓸쓸히 길을 떠나는

젊은 나그네의 절망과 아픔을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독일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곡의 가곡 모음인데요

빌헬름 뮐러는'독일인의 사랑'을 쓴

막스 뮐러의 아버지랍니다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겨울 나그네' 그중에서 두 번째 곡

'Die Wetterfahne'는

풍신기 또는 풍향계라고도 부르는데

바람의 종류와 세기를 나타내는

바람의 깃발이니 바람개비인 거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옛 연인의 집 앞을 서성이는

청년의 안타까움이 바람을 타고 미친 듯

펄럭이며 휘도는 바람개비를 닮았어요

짧고 격렬한 피아노 선율이 매력적입니다


바람에 마구 세차게 흩날리는 깃발이

불안과 절망의 감정을 끌어안고

무수히 흔들리는 나그네의 마음인 듯

깊고 어두운 불안과 절망을

짧지만 절박하고 절실하게 그려내죠


변심한 연인의 집 지붕에서

바람에 놀림이라도 당하듯 돌고 있는

바람개비를 보며 청년은 생각합니다

시리고 찬 바람을 가득 품고 휘도는

바람개비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다고~


'바람이 깃발과 함께 나부끼고 펄럭이며

아름다운 옛 연인의 집 지붕을 맴도는

바람개비를 보며 추억에 잠기는

가여운 나그네를 놀리듯 휘휘 소리

......

바람은 내 안에서도 내 마음을 가지고 놀고

지붕 위에서 휘돌아가듯이 그저 소란하지 않게

깃발아 너는 어이 내 고통을 캐묻는지

그 집 아가씨는 이제 부잣집 신부인데'


어느 모녀의 집에서 머무르며

어여쁜 딸을 사랑했던 한 청년이

사랑의 아픔을 안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며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연인의 집

지붕에서 몸부림치는 바람개비의 모습과

나그네의 가슴에서 슬픔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의 깃발이 혹독하게 아름답습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속절없는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믿어야 하죠


바람의 깃발 흔들어대는 겨울의 끝에는

설렘을 약속하는 봄날이 있고

겨울이 깊고 추울수록

봄이 멀지 않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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