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99 그 누구도 외롭지 않은

영화 '북샵'

by eunring

1959년 영국의 작은 바닷가 마을이 배경인

영화 '북샵'은 흐린 바닷가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바람 부는 바닷가 풍경이 고즈넉하니 아름다워요

16년 전 전쟁으로 남편을 먼저 보낸

플로렌스는 쓸쓸히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남편과의 추억이 남아 있는 그곳에서

서점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어요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가슴에 끌어안고

가만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는

여주인공 플로렌스를

영화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소개하죠


'그녀가 말하기를

책을 읽을 때는 그 안에 살게 된다고 했다

표지가 지붕과 벽이 되는 집처럼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생생한 꿈처럼 살아 숨 쉬는 순간이었다'


플로렌스(에밀리 모티머)는

책을 읽고 바닷가를 산책을 하며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남편과의 추억을 안고 눌러앉아 살게 된

하드버러의 작고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7년 동안이나 비어 있던 낡은 건물을

은행 대출을 받아 구입해

서점을 열기로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그녀가

남편을 처음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특별한 추억의 장소가 바로 서점이거든요

남편을 잃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 그녀는

좋아하는 책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으며

꿈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플로렌스의 서점 소식을 들은

바닷가 마을 권력자인 장군의 아내

가맛 부인(패트리시아 클락슨)은

플로렌스를 초대한 파티에서

그 자리는 서점 대신 문화센터가 어울린다며

다른 곳에서 서점을 열기를 권하지만

무늬만 우아한 가맛 부인의 태도에

언짢아진 플로렌스는 파티 중간에 나오고 말아요


돈과 인맥을 총동원한 가맛 부인의 방해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영리하고 당돌한 소녀 크리스틴과 함께

서점 운영을 시작합니다


착하고 순수한 플로렌스에게

너무 착하게만 살면 안 된다고

따끔 충고를 건네기도 하는 크리스틴은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 물정을 제법 아는

야무지고 영리하고 맹랑한 소녀죠

플로렌스는 꼬맹이 소녀를 직원으로 존중하며

두 사람은 책 속에서 친해집니다


'네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해

끝까지 다 읽진 않더라도

몇 장만이라도 넘겨봐 줘'

크리스틴에게 책을 권하기도 하는

플로렌스의 모습이 아름답고 품격 있어요


외롭게 홀로 살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자발적 은둔 할아버지

에드먼드 브런디쉬(빌 나이)는

플로렌스 서점의 첫 고객이 되고

플로렌스의 서점에 귀여운 소년을 보내

편지로 책을 주문하며 플로렌스를 응원합니다


브런디쉬와 플로렌스는 책을 통해 공감하게 되고

읽기 쉬운 책을 팔아보라는 노스의 권유로

'롤리타'라는 책을 읽게 된 플로렌스가

브런디쉬의 조언을 얻기 위해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그윽하게 아름답습니다


플로렌스의 낡은 서점이

마을의 힐링 장소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가맛 부인은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며

플로렌스를 압박하기 시작하고

작고 낡았으나 그녀의 꿈이고 안식처인

서점을 지키기 위해 플로렌스는 용기를 내지만

서점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풀로렌스를 돕기 위해 브런디쉬는

가맛 부인을 찾아갑니다


'플로렌스 그린을 그냥 두라'고

'서점을 운영하고 싶어 할 뿐'이라는 그에게

가맛 부인은 서점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하죠

거침없이 불쾌하다는 말을 건네고 돌아가는 길에

심장 발작으로 쓰러진 그의 벗겨진 모자와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플로렌스의 스카프가

애잔한 슬픔을 건넵니다


플로렌스 덕분에 용기를 얻어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플로렌스의 서점을 돕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가 세상과 작별하는

브런디쉬의 장례식이 고요히 안타깝고

'민들레 와인' 책을 펴보며 우는

플로렌스의 슬픔이 깊고 먹먹합니다


브런디쉬는 플로렌스가 권해준

레이 브래디버리의 '화씨 451'을 읽고

작가에게 반해 신간 '민들레 와인'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이었으나

그 책을 받아보기도 전에 떠나고 말았던 거죠


시의회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는 플로렌스는

낡은 서점 건물이 물에 잠겼다는 말에

눅눅하지 않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가맛 부인과 손을 잡은

마일로 노스(제임스 랜스) 배신 때문에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서점을 빼앗깁니다


파도소리와 새소리 곁에 앉아 있다가

노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

플로렌스의 모습이 지쳐 보이고

서류에 서명하고 돌아온 플로렌스가

책꽂이의 책들을 어루만지다가

마룻바닥에 가만 엎드려

낡은 서점과 소리 없는 작별을 나누는

장면이 애틋하고 애잔합니다


브런디쉬가 그녀를 믿고 응원한다며

'인간의 가장 훌륭한 미덕인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버티라'고 했으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그녀가

오랜 꿈이고 소망이었던 서점과

조용히 온몸으로 작별하는 장면 위로

처음 서점의 문을 열던 날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가슴 벅찬 그녀의 모습이 겹쳐 떠오릅니다


오랜 꿈을 이룬 순간의 눈부신 행복이

그렇듯 잠깐이었으니 안타깝지만

그녀의 열정이 담긴 서점이

잠시 동안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찰랑찰랑 흔들리는 바닷물결과

스카프를 나부끼며 떠나는 그녀를 내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무심하기만 한데

어린 소녀 크리스틴은 무거운 난로를 들고

서점으로 올라가 남겨진 책들 속에서

언젠가 플로렌스가 읽으라고 권해주었던

책을 찾아들고 플로렌스를 배웅합니다


플로렌스의 열정과 용기를 마음에 새기며

한 권의 책을 들고 서 있는 크리스틴의 뒤로

서점 자리에서 아련히 피어오르는 연기와

사랑스러운 크리스틴의 모습을 바라보는

플로렌스의 눈빛이 먹먹합니다


'그녀가 가슴속 깊이 간직한

열정과 용기는 아무도 빼앗지 못했다'는

크리스틴의 대사가 위로를 건네고

서점을 뺏기고 마을을 떠난 플로렌스 대신

서점 주인이 된 어른 크리스틴이

'그 누구도 서점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플로렌스의 명언을 회상하는

엔딩이 흐뭇합니다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아름다움과

낡고 고풍스러운 서점이 주는 아늑함과 편안함

잔잔히 흐르는 감성적인 음악까지

소란스럽지 않아 감동적인 영화 '북샵'은

느릿하지만 깊은 떨림과 함께

섬세하고 묵직한 울림을 남깁니다

아름답고 귀한 한 권의 책과도 같은

영화 '북샵'의 여운 속에서

집콕하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가

생각나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친구님의 얼굴이 문득 생각나는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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