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692 그대의 생일
봄을 타는 그대에게
친절한 카톡씨가
그대의 생일이라고 알려줍니다
겨울이 잦아들고 봄이 꼬물대는
어중간한 계절에 태어나
겨울감기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어김없이 봄을 탄다는 그대에게
선뜻 내밀기 부끄러운
어설픈 처방전을 건넵니다
햇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큼직한 투명 유리잔 가득
따사롭고 새콤한 청귤차 한 잔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을 초대해서
책을 읽어달라고 청해 보면 어때요
난생처음으로 참석한
조세핀 할머니의 멋진 파티에서
거투르드를 대신해
'제인 에어'의 한 구절을 읽는
당찬 소녀 빨간 머리 앤을 떠올려 봐요
'진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나는 기억해 냈다
희망과 불안
감동과 흥분으로 들끓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 넓은 곳으로 나아가
진정한 삶의 지식을 찾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을'
꿈같은 파티 후 돌아와
이 세상 어디에나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빨간 머리 앤의 벅찬 중얼거림을
그대로 따라 해 보기로 해요
그렇죠
어중간한 이 계절 어디쯤에도
분명 우리의 자리가 있을 테고
그런 거죠
편안한 의자가 놓인 그 어딘가에
우리가 함께 할 자리도 있어요
그러니 우리 이번 봄맞이
그리고 그대의 생일맞이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쉬워하지 말아요
내년 봄날의 꽃은
함께 볼 수 있겠죠
내년 봄바람도 함께 맞으며
나비처럼 나풀대기로 해요
세상에 공짜 없고
날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파릇파릇 봄날도 그렇잖아요
오는 봄도 거저 오지 않겠다는 듯
춘설 나풀대고 잔설도 흩날리고
파고드는 바람 탓에 감기도 오락가락
추위도 물러선 듯하다가
또 덥석 달려들며 꽃샘을 부리죠
차곡차곡 쌓이는
한 살 두 살 나이도
거저 주워 먹는 게 아니라
봄을 타듯 아프게 나잇값 해 가며
또 한 번의 생일을 맞으니까요
그대의 생일 파티는
달콤 새콤한 딸기 파티로 해요
딸기 한 알마다 희망과 불안
그리고 감동과 흥분을 되새기며
빨간 머리 앤처럼 주근깨 송송 박힌
달콤 딸기 한 입에 감기 뚝
새콤 딸기 한 입에 미소 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