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472 오필리아의 시간
영화 '오필리아'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영화의 시작을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끝장면 못지않게 시작도 중요한데요
시작의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보기 시작한 영화 '오필리아'에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명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원작 '햄릿'의 첫 대사
'누구냐'는 물음이
영화의 시작에 나왔을까요?
호수 위에 가련한 꽃잎처럼 떠오른
오필리아의 모습으로 시작했을까요?
그것이 궁금해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오필리아'의 주인공은
당연히 오필리아입니다
이 영화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말하는 듯
오필리아가 선택한 사랑과 시간 속에서
그녀가 선택한 길을 함께 걸으며
오필리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 이야기는 신화가 되고
역사로 남았죠'라고 오필리아가 말하듯이
오필리아의 오필리아에 의한
오필리아를 위한 영화니까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사랑에 버림받아 그만 정신줄 놓아버리고
꽃잎처럼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지는
비련의 오필리아는 영국 화가 존 에버렛의 그림 '오필리아' 속에서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한없이 가련하고 애잔한 모습이지만
영화에서는 당차고 똑똑하고 야무지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도서관에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갈 수 없는
어린 오필리아(미아 퀴니)는
사내아이들과 골목을 쏘다니기도 하고
식탁 아래 숨어 있다가 클로디어스에게
말대꾸를 하려고 얼굴을 드러내기도 해요
여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던 시절
글을 읽을 줄 아는 오필리아는
거트루드 왕비(나오미 왓츠)의 눈에 들어
왕비의 시녀가 되는데요
남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당돌한 소녀랍니다
거투르드 왕비에게 책을 읽어주며
다른 시녀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지만
남들의 시선 따위 상관하지 않고 건너뛰는
지혜롭고 자유로운 오필리아(데이지 리들리)가
여성들이 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금지된 장난이라도 하듯이
책을 모습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입니다
거트루드 왕비의 시녀가 된 오필리아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돌아온 햄릿(조지 멕케이)이 사랑에 빠지는데요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 왕비의 외도를
전하는 역할까지도 오필리아의 몫입니다
몰래 오필리아와 결혼하고
사랑의 도피를 생각하던 햄릿은
오필리아에게서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듣고 난 후 숙부 클로디어스 왕에게 빼앗긴 왕좌를 되찾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합니다
사랑이 복수에 밀린 셈이죠
그러나 사랑이 먼저인 오필리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클로디어스 왕의 위협 따위 개의치 않으며
스스로 물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합니다
그리고 햄릿의 위태로운 결투 시작 전
짧은 머리로 나타난 오필리아는
자신의 죽음이 눈속임이었음을 밝히죠
모든 결말이 결투일 순 없다고
함께 수녀원으로 떠나지고 하지만
복수를 맹세했다며
햄릿은 그녀를 떠나보냅니다
사랑과 복수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사람이
벽을 사이에 두고 결말이 전혀 다른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애틋하고 안타까워요
복수 먼저 사랑 나중을 선택한 햄릿은
결투에서 쓰러져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영화의 시작과 마무리 역시
햄릿이 아닌 오필리아의 몫으로 남아요
복수가 아닌 사랑을 선택한 오필리아는
홀로 살아남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신은 내 이야기 들어 본 적 없죠
피로 점철된 이야기는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난 길을 잃지 않았고 복수 꿈꾸지 않았고
언젠가 내 이야기하겠다는
희망으로 살아남았어요'
영화 말미에서
오필리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당신의 이야기는 무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언젠가는 당신도
당신만의 이야기하게 되겠죠'
어린 딸아이와 함께
붉은 꽃이 듬성듬성 피어 하늘거리는
연둣빛 언덕을 천천히 오르는 엔딩 장면이
고즈넉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나지막한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오래 귓전을 맴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