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499 나는 가수입니다

울 엄마의 전속 가수입니다

by eunring

아침이면 엄마와 함께 하는

몇 가지 놀이가 있어요

우선 엄마가 기억하시는 일본어 숫자로

천천히 1부터 100까지를 함께 세어봅니다


함께라고는 하지만

내가 소리를 내어 수를 세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중간에 훈수를 드시는 분이 엄마입니다


숫자를 세다가 일부러 틀리기도 하고

도통 생각이 안 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는 나를

에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바라보며

척척박사처럼 끼어드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신가 봐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울 엄마는 자식을 이기십니다


숫자를 100까지 다 세고 나면

100점이라고 마주 보고 하하 웃기도 하고

숫자공부 후에는 이어서 한자공부를 하는데요

천자문을 엄마가 기억하시는 데까지

그것도 내가 외우다가 멈칫한다 싶으면

엄마가 슬며시 거드십니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즐겁게 노래도 불러야죠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 동요를 불러요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산바람 강바람' 동요를 부르죠

산 위에서 부는 바랑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강아지가 지나가면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나는 가수입니다

노래 솜씨도 없고 고음 불가인 내가

울 엄마의 전속 가수인 셈이죠


오늘 아침 뜬금없이 엄마가

'노들강변'을 신청하셨어요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

거기까지는 주워들은 대로 불렀는데

그다음이 애매해서 얼버무리는 내게

엄마가 넌지시 다음 가사를 알려주십니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지만

대충 흥얼대다 보니

'무정세월'이라는 노랫말이

말 그대로 무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엄마가 중얼거리듯 일러 주시는 노랫말에

엄마의 고단한 인생이 묻어 있고

세월의 무상함도 한가득이고

엄마와 함께 하는 애틋한 시간도

꿈인 듯 물인 듯 흘러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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