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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Oct 15. 2023

초록의 시간 601 다홍빛 구기자를 보며

구기지 말고 활짝 펴자는 주문을 걸어요

후드득 토도독~

느닷없이 쏟아져 흐트러지며

소란스레 달려드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아쉬움에 젖어듭니다

지난여름에도 무엇이 그리 바빴던지

봉숭아꽃물을 건너뛰고 말았거든요


조금씩 희미하게 줄어드는

봉숭아꽃물 보며 첫눈을 기다리던

손톱 끄트머리에서 배시시 웃던 소녀 감성도 

분주하고 빠듯한 일상에 치이고 밀려

저만치 달아나버리고 말았으니

더는 기다릴 그 무엇 하나 없는 듯한

씁쓸하고 허전한 마음 살살 달래며

조신하게 앉아 구기자차를 마십니다


알알이 갸름한 보석 같은

맑은 다홍빛 구기자를 보며

열매 이름은 구기자지만

구겨진 몸과 마음을

활짝 펴자는 생각을 하면서

중얼중얼 주문을 걸어 봅니다


구기지 말고 펴자~

어깨 쫙 펴고 허리도 쭉 늘이며

구겨진 몸과 마음

그리고 찡그린 얼굴까지도

반듯하고 당당하활짝 펴자~


열매 이름은 구기자지만

신 듯 떫은 듯 미묘한 쓴맛과

오묘한 단맛이 어우러지는

구기자차를 자주 마시다 보

눈과 귀가 밝아지고

얼굴빛이 맑아진다니

표정과 기분까지맑고 밝아져

환하게 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구기자나무의 열매인 구기자는

새악시 다홍치마처럼 붉은빛이

오미자랑 비슷하긴 한데

오미자는 동글동글 귀엽고

구기자는 새초롬 갸름해요


한때는 알알이 초롱하니

곱고 예쁘고 영롱한 열매였으나

이제는 바짝 말라 쪼그라진

구기자의 밝고 붉은빛이

다홍빛으로 사랑스럽습니다


빨강과 주황을 잘 섞어놓은 듯

선명하고 산뜻한 붉은빛이 진해서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 같기도 하고

여름날 손톱을 곱게 물들인

봉숭아꽃물 같기도 해요


갸름하게 비틀어지고

쭈그러질 대로 쭈그러졌으나

그 나름 곱고 야무진 다홍빛 구기자

구기자차를 우려 미시며

처음엔 그 맛을 잘 몰랐어요


제대로 맛을 느껴 보려고

일부러 진하게 우려 보기도 했는데

맛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도

얼마간의 시간과 마음의 기울임

필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눈과 귀가 밝아진다고 하니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며

친구처럼 곁에 두고

찬찬히 마셔야겠어요


연하든 진하든

약간 매운 듯도 하고

조금은 쓰고도 떫으면서도 

순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기분 좋아요

꿀이나 설탕을 타서 마셔도 좋다지만

그냥 구기자의 맛으로 충분합니다

맛에도 길들여져 새콤하고도 단맛이

정겹온화하고 편안하거든요


가을이 깊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지난여름 손톱에 물들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봉숭아꽃물 닮은

다홍빛 열매구기자차를 우려 마시다 보니

구기자나무도 한번 만나보고 싶고

나물로 먹고 차로도 마시면 향이 좋다는

구기자나무 어린잎도 궁금하고

구기자나무의 자줏빛 꽃도 보고 싶어요


아는 게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말이

뜬금없이 떠올라 또 웃게 됩니다

먹고 싶은 게 많아

궁금한 것도 많겠다는 말로 바꾸면

그게 바로 나야 나~니까요


구기지 말고 펴자~

연거푸 주문을 걸어 봅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주저앉은 듯

꾸깃꾸깃 구겨진 내 모든 것을

다림질이라도 하듯이

반반하고 반듯하게 활짝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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