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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Oct 13. 2023

초록의 시간 600 새하얀 꽃과도 같은

햅쌀밥 한 그릇

늘 까무잡잡 까칠 소녀 같은

울퉁불퉁 잡곡밥만 먹다가

오랜만에 뽀샤시

서울 아씨처럼 희고 고와서

해맑은 한 송이 꽃과도 같은

햅쌀 한 봉지를 앞에 두고 아싸~

하얀 햅쌀밥 한번 해 먹어보자고

생각하는 순간 흐뭇 미소가

먼저 피어납니다


이왕이면 예전에 엄마가 해 주시듯

고슬고슬 냄비밥을 해보자고

부질없는 욕심까지 한껏 부려봤는데요

쌀을 씻다가 엄벙덤벙

쌀알 흘려놓고는

어릴 적 할머니 말씀 떠올라

쌀 한 톨을 위해 농부님들이 흘린

방울방울 땀방울 생각하며

한 알 두 알 귀하게 모아 담았죠


어리바리 덤벙대면서

인덕션에 덥석 냄비 올려

하얀 햅쌀밥을 하다가

그만 밥을 태우고 말았어요

노릇노릇 누룽지까지 비라며

냄비까지 태워버리고 말았으니

이럴 때 낭패라는 말을 써야 할까요


낭패 란 계획이 실패하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되었을 때

쓰는 말인데 과 패는 전설의 동물이라죠

낭은 뒷다리가 없거나 아주 짧고

패는 앞다리가 없거나 아주 짧은

상상의 동물이라는군요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데

둘의 사이가 틀어져버렸으니

그야말로 낭패인 거죠


햅쌀밥과 낭패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어긋나 버렸으니

낭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대략 낭패인 셈입니다

대충 생각해도 실패임이 분명하니까요


어쨌든 바닥에 눌어붙은 까만 밥알까지

한 알도 버리지 않고 누룽지 해 먹으려고

박박 정성껏 잘 긁어놓고

냄비 바닥 문질러 닦느라

바락바락 한참 부지런을 떨며

또 한 번 내 손은 꽝손임을 확인했어요


밥은 밥솥에

빨래는 세탁기에

청소는 로봇청소기에

그저 감사히 믿고 맡기면 될 것을

솜씨도 꽝이면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대책 없이 덤빈 나 자신이 문득

우스워서 하하 웃고 맙니다


탄맛이 깃든 햅쌀밥 먹으며

음~ 밥에서도 커피의 탄맛이 나는구나

주근깨 콕콕 박히듯 까맣게 탄

누룽지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래~ 구수함이 진해지면

쓴맛이 나는 건 당연지사라고

고개 끄덕입니다


밥 한 숟가락에도

인생의  쓴맛은 고스란히 스며있고

태워 먹은 냄비바닥에도

인생의 쓰디쓴 실패가

엄연히 존재함을 느낀

귀하고도 아쉬운

대략 낭패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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