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ring Feb 06. 2024

초록의 시간 688 슬픔이 영글어서

사과합니다

사과를 봅니다

그리고 사과합니다


서러워서 설이라시던

어릴 적 듣던 할머니 말씀이

문득 떠오르는 설 무렵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보며

중얼중얼 사과합니다


할머니의 설은 서러워서

그리고 내 설날은 슬픔이 영글어서

서러운 설이 되고

슬픔의 설날이 됩니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꼬까옷 색동저고리 설빔을 입고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흔적도 없이 

대체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그 시절 함께 색동저고리 입고

까르르 던 동생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나처럼 사과를 좋아하던 동생은

아파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과를

나중에 실컷 먹겠노라 했었는데

한 알은커녕 한 조각도 먹지 못하고

멀리 가 버렸어요


바스락거리는 새 돈을 반듯하게 챙겨

세뱃돈을 주시던 딸바보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서 허허 웃고 계실까요

사과처럼 사랑스러운 딸들을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한 동네에 불러 모아 살며

날마다 맛난 거 사주시겠다고

큰소리 빵빵 치시더니

딸들이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저 멀리 가 버리셨어요


사과처럼 예쁘지는 않으나

사과를 좋아하는 내게

사과처럼 땡글땡글 맺히는

그리움으로 오는 설날


사과를 보며

지금 내 곁에 없는

그리운 이들에게 사과합니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있을 때 잘할 걸

내 곁에 있을 때

나중 말고 바로 그때

더 소중히 아껴줄 걸~

작가의 이전글 초록의 시간 687 사람이 좋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