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695 떨어진 꽃의 기억
동백을 주워요
한 잎 두 잎 나풀대며
나붓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한순간 뚝 떨어져
바닥에 누운 동백꽃을 주워
화분 안에 넣어줍니다
'홍루몽'의 어린 연인들
가보옥과 임대옥이 떠오릅니다
덧없는 사랑을 맺지 못하고
안타깝게 헤어진 두 사람을 보는 듯~
가보옥이라면 꽃잎들을 모아
강물에 띄워줄 테고
임대옥이라면 꽃무덤을 만들어
꽃잎들을 고이 묻어주었겠죠
인생무상이지만
'홍루몽' 속 세상이 아니니
꽃무덤까지는 만들지 않고
자신의 뿌리 가까이 줄기 가까이
잎사귀 가까이 꽃송이 가까이
정든 이들과 가까이 있으라고
포근한 화분 안에 넣어줍니다
떨어져도 곱고 붉은 꽃 동백은
피어나기 위해 애쓴 시간의 힘 덕분인지
미련 없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까지도
서글프거나 소란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가는
고운 뒷모습이라서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떨어진 꽃송이까지도 아름다운 것은
지난 시간의 소중한 기억들 덕분이죠
나란히 화분의 흙 위에 앉아 있는
두 송이 붉은 동백을 보며
곧 문 닫을 예정이라는
동네 빵집을 생각합니다
빵집 이름이 동백빵집도 아니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초록별빵집인데
떨어진 동백꽃과 문을 닫게 될 빵집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딱 이거라고 대답은 못하지만
내 마음이 꽃과 빵 그 둘을 향해
나란히 다가서는 걸 어쩌겠어요
작고 정갈해서 더 소중한
내 애착 빵집인 그 가게에서
아프고 열이 날 때면 문득 부드러운
파운드케이크가 생각난다는
빵순이 친구에게
말린 무화과 듬뿍 들어 있는
파운드케이크도 보내줄 수 있었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귀여운 마들렌과
내가 좋아하는 과일조각이 콕콕 박힌
고소하고 상큼하고 바삭한 쿠키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었어요
가래떡데이에는 가래떡 대신
초콜릿옷 입은 키다리 막대과자를~
성탄절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며
슈톨렌이라는 독일식 과일케이크를~
다정한 친구들과 재미나게 나누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
동네 빵집과의 작별이
꽃과의 이별인 듯 아쉽습니다
고이 피어난 동백꽃
붉은빛으로 떨어질 무렵
애착 빵집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내 마음의 나뭇가지에서도
고운 이파리 하나 팔랑 떨어지는 듯
떨어진 꽃의 기억과도 같은
마음의 이파리 하나 주워 들고
추억의 이파리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하나둘 아끼듯 되새겨보며
한 송이 꽃과도 헤어지고
정든 동네 빵집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
오늘이 더 귀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덧없는 인생이니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거죠
떨어진 꽃의 기억 속에도
시간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지난 순간들이 머물러 있으므로
마음에 아롱지는 잔물결들이
아쉬움의 깊이만큼 애틋한
작별의 순간입니다
안녕 붉은 동백
안녕 내 작은 빵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