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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Feb 17. 2024

초록의 시간 695 떨어진 꽃의 기억

동백을 주워요

한 잎 두 잎 나풀대며

나붓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한순간 떨어져

바닥에 누운 동백꽃을 주워

화분 안에 넣어줍니다


'홍루몽' 어린 연인들

가보옥과 임대옥이 떠오릅니다

 덧없는 사랑을 맺지 못하고

안타깝게 헤어진 두 사람을 보는 듯~


가보옥이라면 꽃잎들을 모아

강물에 띄워줄 테고

임대옥이라면 꽃무덤을 만들어

꽃잎들을 고이 묻어주었겠죠


인생무상이지만

'홍루몽' 속 세상아니니

꽃무덤까지는 만들지 않고

자신의 뿌리 가까이 줄기 가까이

잎사귀 가까이 꽃송이 가까이

정든 이들과 가까이 있으라고

포근한 화분 안에 넣어줍니다


떨어져도 곱고 붉은 꽃 동백은

피어나기 위해 애쓴 시간의 힘 덕분인지

미련 없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까지도

서글거나 소란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가는

고운 뒷모습이라서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떨어진 꽃송이까지도 아름다운 것은

지난 시간의 소중한 기억들 덕분이죠

나란히 화분의 흙 위에 앉아 있는

두 송이 붉은 동백을 보며

 문 닫을 예정이라는

동네 빵집을 생각합니다


빵집 이름이 동백빵집도 아니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초록별빵집인데

떨어진 동백꽃과 문을 닫게 될 빵집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딱 이거라고 대답은 못하지만

내 마음이 꽃과 빵 그 둘을 향해

나란히 다가서는 걸 어쩌겠어요


작고 정갈해서 더 소중한

내 애착 빵집인 그 가게에서

아프고 열이 날 때면 문득 부드러운

파운드케이크가 생각난다는

빵순이 친구에게

말린 무화과 듬뿍 들어 있는

파운드케이크도 보내줄 수 있었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귀여운 마들렌과

내가 좋아하는 과일조각이 콕콕 박힌

고소하고 상큼하고 바삭한 쿠키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었어요


가래떡데이에는 가래떡 대신

초콜릿옷 입은 키다리 막대과자를~

성탄절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며

슈톨렌이라는 독일식 과일케이크를~

다정한 친구들과 재미나게 나누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어서

동네 빵집과의 작별이

꽃과의 이별인 듯 아쉽습니다


고이 피어난 동백꽃

붉은빛으로 떨어질 무렵

애착 빵집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내 마음의 나뭇가지에서도

고운 이파리 하나 팔랑 떨어지는 


떨어진 꽃의 기억과도 같은

마음의 이파리 하나 주워 들고

추억의 이파리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하나둘 아끼듯 되새겨보며

한 송이 꽃과도 헤어지고

정든 동네 빵집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

오늘이 더 귀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덧없는 인생이니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거죠


떨어진 꽃의 기억 속에도

시간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지난 순간들이 머물러 있으므로

마음에 아롱지는 잔물결들이

아쉬움의 깊이만큼 애틋한

작별의 순간입니다


안녕 붉은 동백

안녕 내 작은 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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