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18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길고 오랜 장마를 배웅하느라
비몸살에 시달렸습니다
짬이 날 때마다
시들하니 잠에 빠져서
여긴 어디 난 누구?
아플 땐 아프다고 수선 피우거나
징징대거나 엄살 부리지 않고
혼자 몰래 아프다가
심하면 병원 약 먹고
견딜만하면 대충 며칠 앓고
뜨끈 매콤 국물에 대파 듬뿍 넣어
후루룩 밥 말아 한 그릇 뚝딱이면
몸살감기와 사이좋게 작별하는데요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이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목소리가 그만 맛이 가 버렸거든요
목소리 안부 대신 깨톡 안부 나누는
친구에게도 들키고 밀았어요
늘 하던 저녁인사를 잠에 취해
건너뛰고 말았거든요
무슨 일 있느냐 친구가 묻기에
장마를 배웅하는 비몸살이라고
어영부영 둘러댔어요
잠 푹 자며 쉬었더니 나아간다고
염려 말라고 덧붙였어요
친구가 쉰 김에 더 푹 쉬라고
한여름 에어컨 바람에
감기몸살 오래가는데
잘 견뎌내어 고맙다고
칭찬을 건넵니다
칭찬받았으니
춤이라도 춰야 할까요
고래가 아니니 춤은 생략하고
대신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장마를 배웅하며
감기몸살도 배웅합니다
어쩌면 내 맘이
버거웠던 건지도 몰라요
마음이 버거우면 주저앉고 싶으니
당연히 몸에 병이 납니다
몸도 살고 싶어 몸부림을 하는 거죠
사실 버거워할 필요가 없는 건데요
그저 하나하나 마주하면 된다는 걸
습관처럼 까먹으니 버거워지고
버거우니 병이 난 거죠
아무리 둘러보아도 세상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들이
훨씬 더 많고
장마가 끝난다고
눅눅함 대신 보송함이
성큼 다가서는 것도 아니고
아직 한참을 더 오래
무더위와 맞짱을 떠야 하니까요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아직 내가 버리지 못한
버거움도 훌훌 털어버립니다
종종걸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마주하면 되는 거죠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
될 놈 될 안될 안~중얼거리며
꽃나무가 아낌없이
꽃송이 훌훌 떨구듯
꽃송이들이 미련 없이
나풀나풀 땅 위로 내려앉듯이
한 번에 하나씩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욕심부리지 않고
차분히 마주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