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록의 시간 818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by eunring

길고 오랜 장마를 배웅하느라

비몸살에 시달렸습니다

짬이 날 때마다

시들하니 잠에 빠져서

여긴 어디 난 누구?


아플 땐 아프다고 수선 피우거나

징징대거나 엄살 부리지 않고

혼자 몰래 아프다가

심하면 병원 약 먹고

견딜만하면 대충 며칠 앓고

뜨끈 매콤 국물에 대파 듬뿍 넣어

후루룩 밥 말아 한 그릇 뚝딱이면

몸살감기와 사이좋게 작별하는데요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이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목소리가 그만 맛이 가 버렸거든요

목소리 안부 대신 깨톡 안부 나누는

친구에게도 들키고 밀았어요

늘 하던 저녁인사를 잠에 취해

건너뛰고 말았거든요


무슨 일 있느냐 친구가 묻기에

장마를 배웅하는 비몸살이라고

어영부영 둘러댔어요

잠 푹 자며 쉬었더니 나아간다고

염려 말라고 덧붙였어요


친구가 쉰 김에 더 푹 쉬라고

한여름 에어컨 바람에

감기몸살 오래가는데

잘 견뎌내어 고맙다고

칭찬을 건넵니다


칭찬받았으니

춤이라도 춰야 할까요

고래가 아니니 춤은 생략하고

대신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장마를 배웅하며

감기몸살도 배웅합니다


어쩌면 내 맘이

버거웠던 건지도 몰라요

마음이 버거우면 주저앉고 싶으니

당연히 몸에 병이 납니다

몸도 살고 싶어 몸부림을 하는 거죠


사실 버거워할 필요가 없는 건데요

그저 하나하나 마주하면 된다는 걸

습관처럼 까먹으니 버거워지고

버거우니 병이 난 거죠


아무리 둘러보아도 세상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들이

훨씬 더 많고

장마가 끝난다고

눅눅함 대신 보송함이

성큼 다가서는 것도 아니고

아직 한참을 더 오래

무더위와 맞짱을 떠야 하니까요


꽃눈길을 걸으며

장마를 배웅합니다

아직 내가 버리지 못한

버거움도 훌훌 털어버립니다


종종걸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마주하면 되는 거죠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

될 놈 될 안될 안~중얼거리며


꽃나무가 아낌없이

꽃송이 훌훌 떨구듯

꽃송이들이 미련 없이

나풀나풀 땅 위로 내려앉듯이


한 번에 하나씩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욕심부리지 않고

차분히 마주하기로 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초록의 시간 817 식전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