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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판타지 002 나 혼자 중얼거림

나는 바람이야

by eunring

눈먼 이의 곁을 서성이는

나는 바람이야


살랑 스치는 수줍은 바람이기도 하고

여유를 즐기는 느긋 바람이다가도

휘모리장단처럼 거침없이

마구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이기도 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한 줄기 바람이 바로 나야 나~


그런데 왜 지금은

부드럽게 스쳐가거나

휘리릭 거침없이 불어대지 않고

머뭇머뭇 서성이냐고 묻고 싶겠지

판타지 바람이어서~라고 답하면

우문현답 아닌 동문서답이 될 테니

그렇게 답하지는 않을게


눈먼 이가 앉아 있는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서

나라는 바람이 지금

맘껏 날아오르지 못하는

소원의 종이학 한 마리 때문이야

곱고도 선명한 빨강으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기 때문이지


고사리손으로 색종이를 접으며

눈먼 이의 꼬맹이딸 영영이가

건절한 소원을 담은 종이학이거든

클쑤마스는 왜 꼭 12월이야 하냐고

배 뿡뿡 산타할아버지 대신

산타할머니가 올 수는 없냐고

산타할머니 대신

선타엄마가 오면 안 되는 거냐고


착한 아이 영영이에게

선물을 주시려거든

인형도 공주옷도 장난감도 아닌

예쁜 산타엄마를 주시라고

다른 선물 1도 필요 없으니

그립고 보고픈 엄마를 보내달라고~


사랑스러운 소녀 영영이가

귀욤 글씨로 또박또박

소원을 적은 진한 빨강 종이학을

나뭇가지에 걸어놓았으니

내 바람자락이 주춤거릴 수밖에~

영영이의 소원을

헛되이 날려 보내고 싶지 않아서

머뭇머뭇 서성일 수밖에~


사실 난 말이야

눈먼 이의 멋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어 놓으며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 잡아봐라~

저만치 달아나고 싶거든

눈먼 이의 그윽한 분위기를

잠시 흔들어보고 싶으니 말이야


그가 희고 긴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

그 순간의 무심함에 얹히는 눈부신 햇살에

내 마음이 심쿵 내려앉거든

그 멋진 순간의 눈부심이

나 역시 간절하지


그러나

사랑스러운 꼬맹이 소녀

영영이의 깊은 간절함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발걸음 숨 죽이며

망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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